[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① 김지태 씨 '박정희 혁명자금' 거부하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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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1면엔 충격적인 사진이 실린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군의 주검 사진이 게재된 것이다. 당시 부산일보 사장은 김지태 씨였다.
김 씨는 부산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삼화고무와 조선견직, 한국생사 등 많은 기업을 경영했고, 2, 3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특히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현 MBC), 부산문화방송(부산 MBC) 등을 소유한 언론사주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언론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부산문화방송의 주조정실을 부산일보 사장실로 옮겨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와 4·19 혁명을 생생하게 송출하게 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4·19 혁명이 점화되는 과정에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큰 역할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김 씨가 있었다.
그는 1958년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를 설립해 4년간 총 1만 2천364명에게 17억 7천만 환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당시 군수기지사령관과의 어긋난 인연으로 김 씨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군 실력자로 부산에 내려온 박 사령관과 부산이 낳은 '전국구' 기업인인 김 씨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런데 1961년 박 사령관이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가 문제였다. 박 사령관은 5·16 직전 김 씨에게 자금을 요청했고, 김 씨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씨의 아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박 사령관이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전 부산일보 주필을 통해 아버지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자금 요청 건과 관련해 박 사령관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온 적도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박 사령관과 김 씨의 관계는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 명단에 김 씨가 포함됐다. 이어 1962년 4월 김 씨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돼 구속 수감되고 말았다. 김 씨의 유족은 "5·16 거사 자금 500만 환(약 5억 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② 군사정권, 김지태 씨 개인재산 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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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4월 초 어느 날 새벽, 김지태 씨의 부인 송혜영 씨의 자택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송 씨는 다짜고짜 끌려갔다. 해외여행에서 반지 하나와 카메라 한 대를 산 것을 두고 밀수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송 씨는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 씨를 국내로 불러들이기 위한 '인질'이었다. 며칠 후 김 씨는 국내로 들어왔고, 곧바로 체포돼 4월 24일 부정축재 혐의 등 9개 혐의로 구속됐다. 군검찰은 5월 24일 김 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결국 김 씨는 구형 다음 날 5월 25일 재산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6월 20일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서울문화방송, 부일장학회 및 부산시내 토지 10만여 평 등을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옛 명칭)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내용의 '기부승낙서'에 서명 날인했다. 김 씨는 그 이튿날 공소 취소로 석방됐다.
이를 두고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5년 '김지태의 재산헌납은 표면상 자발적으로 기부된 것으로 보이나 구속수감 중인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기부승낙서의 날짜 변조 사실도 확인했다. 6월 20일 구속 수감상태에서 기부했다는 의혹을 지우기 위해 날짜를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했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으로 확인한 것.
실제 김 씨도 1976년 발간한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며 부산일보 등을 강제로 헌납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구속된 조건 아래 그런 서류를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 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고 회고했다.
김 씨의 큰 아들인 김영구 씨도 언론 인터뷰에서 "그 해 5월 25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내가 장남이라 인감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군사정부가 개인재산을 '강탈'해 '5·16장학회'에 넘긴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포기는 헌납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③수조 원대 재산 박정희 일가로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김지태 씨로부터 '강탈'해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옛 명칭)에 넘긴 재산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강제 헌납된 부산일보 주식 100%와 한국문화방송(현 MBC)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부일장학회 소유 토지 10만 평 등의 당시 평가액은 총 8천500만 원이다. 이 중 현재 시가로 1조 원으로 추정되는 부산시내 토지 10만 평은 1963년 국방부에 양도됐다.
나머지를 포함해 현재 정수장학회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부산일보 주식 100%(20만 주)와 MBC 주식 30%(6만 주), 서울 정동의 경향신문사 부지 2천385㎡(723평) 등이다.
언론사 주식은 비상장 주식이어서 시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산일보는 한국 제2의 도시에서 발행되는 전국 5위권 내의 유력 신문이다. MBC는 최대 지상파 방송사 중 하나다. 경향신문사 부지는 평당 수천만 원에 이르는 금싸라기 땅이다. 2005년 언론노조는 정수장학회 재산을 최소 1조 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MBC가 민영화 될 경우 자산이 최대 1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는 만큼 정수장학회의 재산 가치는 수조 원에 달할 수도 있다.
정수장학회의 재산은 대부분 김지태 씨로부터 강제 헌납 받은 재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김 씨의 재산이 당시 5·16장학회로 넘어간 부분이다.
설사 김 씨에게 범죄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면해주고 재산을 강탈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 재산을 국가에 귀속한 게 아니라 또 다른 단체에 넘겨준 것은 법과 원칙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그런데 5·16장학회와 그 이름을 바꾼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과 일가들이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부정축재의 수단"이라고 규정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수장학회에 대해 "범죄의 증거이자 장물"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지태 씨 수사를 지휘한 박용기 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조차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죄가 있으면 처벌하면 되지 재산을 뺏는 것은 잘못됐다. 그것도 국가에 재산을 헌납했으면 문제가 없지만 5·16장학회를 만든 것은 문제였다. 특정인에게 재산이 갔으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고 회고했다.
특별취재팀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④ '부정축재' 유산, 박근혜 의원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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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7월 5·16장학회가 출범했다. 김지태 씨로부터 강탈한 부산일보와 MBC 등이 기본재산이었다. 김 씨의 재산은 국고에 환수되지 않은
것은 물론 국유재산법 등에 따른 절차도 거치지 않고 5·16장학회로 이전됐다.
이 모든 과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 당시 기부승낙서에 김 씨의 날인을 받은 고원증 전 법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62년 6월께 '중앙정보부가 김지태 씨한테서 기부 받아둔 재산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박정희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내려갔다"고 증언했다.
이후 5·16 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 동창, 행정부 각료 등이 이사장과 이사진을 장악했다. 이를 두고 백원우 국회의원은 2005년 "완벽에 가깝게 박 전 대통령의 사유 재산화 됐다"고 말했다. 부정축재를 했다는 이유로 남의 재산을 빼앗아 결국 자신이 부정축재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16장학회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1982년 1월 이름을 '정수장학회'로 바꾼다. '5·16'이란 이름을 바꾸라는 전두환 정권의 요구에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를 따서 개명을 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부정축재의 유산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고스란히 승계됐다. 80년대 들어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에는 조태호(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서), 김창환(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김귀곤(정수장학회 출신자 모임 상청회 고문) 씨 등 박 전 대표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앉았다. 박 전 대표는 1995년 직접 나서서 2005년 물러날 때까지 10년간 이사장을 지냈다. 연봉은 2억 5천만 원까지 받았다. 2005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논란이 되자 박 전 대표는 이사장 자리를 박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의 최필립 씨에게 넘겨준다.
이 모든 과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 당시 기부승낙서에 김 씨의 날인을 받은 고원증 전 법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62년 6월께 '중앙정보부가 김지태 씨한테서 기부 받아둔 재산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박정희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내려갔다"고 증언했다.
이후 5·16 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 동창, 행정부 각료 등이 이사장과 이사진을 장악했다. 이를 두고 백원우 국회의원은 2005년 "완벽에 가깝게 박 전 대통령의 사유 재산화 됐다"고 말했다. 부정축재를 했다는 이유로 남의 재산을 빼앗아 결국 자신이 부정축재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16장학회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1982년 1월 이름을 '정수장학회'로 바꾼다. '5·16'이란 이름을 바꾸라는 전두환 정권의 요구에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를 따서 개명을 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부정축재의 유산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고스란히 승계됐다. 80년대 들어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에는 조태호(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서), 김창환(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김귀곤(정수장학회 출신자 모임 상청회 고문) 씨 등 박 전 대표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앉았다. 박 전 대표는 1995년 직접 나서서 2005년 물러날 때까지 10년간 이사장을 지냈다. 연봉은 2억 5천만 원까지 받았다. 2005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논란이 되자 박 전 대표는 이사장 자리를 박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의 최필립 씨에게 넘겨준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이사장을 그만뒀기 때문에 정수장학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수장학회에 대한 지배권이 여전히 박 전
대표에게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⑤ "강탈 결론·권고 무시 버티기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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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와 그 전신인 5·16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50여 년간 끊임없이 불거졌다.
김지태 씨 본인은 1962년 석방 직후부터 "부산일보 등 재산을 구속상태에서 탈취당했다"며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국회에서는 1964년 12월 당시 민주당 정일형, 서민호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정치쟁점화 됐으며,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도 5·16장학회의 탄생배경을 폭로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했다.
1988년 부산일보 노조가 5일째 파업을 벌이며 편집권 독립투쟁을 할 때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해 '부산일보 등의 소유권 원상회복' 등이 국회에 청원됐고, 14명의 부산 출신 국회의원 전원이 소개의원으로 서명 날인했다. 1993년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도 국정감사를 통해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급기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부일장학회 헌납 의혹 사건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인 언론자유와 사유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다"고 규정했다.
위원회는 "강압에 의해 헌납됐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며 "박 전 대통령과 그 유족을 중심으로 사유재산처럼 운영되었던 정수장학회를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김지태 씨의 유지를 되살릴 수 있도록 쇄신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지태 씨 본인은 1962년 석방 직후부터 "부산일보 등 재산을 구속상태에서 탈취당했다"며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국회에서는 1964년 12월 당시 민주당 정일형, 서민호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정치쟁점화 됐으며,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도 5·16장학회의 탄생배경을 폭로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했다.
1988년 부산일보 노조가 5일째 파업을 벌이며 편집권 독립투쟁을 할 때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해 '부산일보 등의 소유권 원상회복' 등이 국회에 청원됐고, 14명의 부산 출신 국회의원 전원이 소개의원으로 서명 날인했다. 1993년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도 국정감사를 통해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급기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부일장학회 헌납 의혹 사건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인 언론자유와 사유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다"고 규정했다.
위원회는 "강압에 의해 헌납됐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며 "박 전 대통령과 그 유족을 중심으로 사유재산처럼 운영되었던 정수장학회를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김지태 씨의 유지를 되살릴 수 있도록 쇄신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정수장학회와 실질적 '오너'인 박근혜 전 대표는 정부기관의 결론과 권고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법적인 강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특히 최근 부산일보 사태가 불거지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 심지어 보수언론조차 박 전 대표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데도 요지부동이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언제까지 국가적인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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