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2011.04.02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권혁태 옮김/돌베개·2만원



일본 리버럴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는 반대한다. 그들은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로 자임한다. 정당으로 치면 사민당이나 민주당 왼쪽 세력, 신문으로 치면 중도적 <아사히신문>이 거기에 속할 것이고, 이른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대다수가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스테레오타입화한 일본 우파에 대한 경계심이나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 일본에 처음 가 본 사람들은 뜻밖의 상황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본 일본인들 대다수는 그들이 간직했던 우파(극우) 이미지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배려하며 합리적이고 양심적이며 부드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우파에 대한 고정관념 위주로 형성된 한국인들의 일본인관은 일거에 무장해제당하기 쉽다. 서 교수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 한국인들의 우호적인 일본인관은 대체로 부정확하고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안타까운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하다”고 말한다.

서 교수는 지난 20여년 동안 일본 리버럴 지식인들은 사상적으로 끝없이 퇴락해왔다고 본다. 그것이 일본의 비극이다. 중간을 자처하는 리버럴은 우파의 왕당파적 국수주의나 공격적인 국가주의를 거부하지만 그들과 같은 일본 ‘국민’으로서 향유하는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자기중심적 ‘국민주의’로 퇴락해갔다. 이 국민주의는 어떤 국면에선 우파의 국수·국가주의와 대립관계를 이루지만 식민지배를 통한 약탈과 노동착취를 통해 축적된 일본 국민의 윤택한 경제생활이나 문화생활, 곧 일본 국민으로서 향유하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외부의 타자(또는 내부 타자인 재일외국인, 곧 ‘비국민’)로부터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우파와 보완관계, 공범관계로 전환한다. 그때 리버럴 다수는 시종 양비론을 앞세우며 방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것이 지난 수십년간 일본 우파의 대두를 결정적으로 도왔다. 외부인들의 눈에는 이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빤히 보이는 우파보다 리버럴이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서 교수는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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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존 티한 지음·박희태 옮김/이음·2만2000원

<신의 이름으로>보다 일찍 나왔으며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는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돌베개·2005) 역시, 모든 종교는 자신의 교리 속에 폭력을 성스러운 의무로 둔갑시키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 담론은 비폭력에서 폭력으로 도약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 준다고 논증한다. 이런 면에서 브루스 링컨뿐 아니라 모든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은닉된 폭력성을 우리보다 더 자세히 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 신학자나 르네 지라르와 같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만은 여타의 유일신교가 내장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강변한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어주라’고 했던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존 티한의 주장은 숱한 종교학자들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근거로 삼는 것은 종교학이나 인접한 인문학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데 유리하고 합당한 심리적·문화적 사전(事前) 경향을 마음속에 축적시켜 왔는데, 한 집단이 친족 범위를 넘어선 더 큰 사회를 이루려면 반드시 도덕 체계가 필요하다. 도덕은 사회에 필요한 결속과 협동을 장려하고 희생을 보상하며, 배신자와 사기꾼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그들을 처벌한다. 인간의 진화에서 도덕은 이처럼 중요하며,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친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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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 예외주의들은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예수가 모든 인종(민족)에게 복음을 개방하고 인류의 희생양이 됨으로써,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물론이고 이기적 유전자의 복사라는 진화의 윤리마저 초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목사의 용렬한 망언이 가르쳐주듯이 기독교 보편주의는 유대인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훨씬 광범위한 외부 집단을 새로 만들어낸다. 유대인에겐 고작 사마리아인이 외부였으나, “기독교 보편주의는 가장 자유롭고 자비로운 상태에서조차 동일화에 대한 강제적 담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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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
김영두 지음/역사의아침·1만3000원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는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 퇴계 이황(1501~1570·오른쪽)과 율곡 이이(1536~1584·왼쪽)의 정치사상과 정책방향을 비교해 두 사람의 같음과 다름을 살피는 책이다. 지은이 김영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2004년에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펴내 선생과 후학 사이에서 벌어진 조선시대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운 철학논쟁을 소개해준 바 있다. 이번 책은 철학담론 자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두 거두가 올린 상소문을 비교해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처방을 내놓았는지 검토한다. 이 책이 다루는 상소문은 퇴계의 <무진육조소>(1568)와 율곡의 <만언봉사>(157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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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육조소>는 퇴계의 처신으로 보면 아주 예외적인 글이다. 국정운영의 원칙과 방향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밝힌 유일한 상소이기 때문이다. ‘무진육조소’란 무진년(선조 1년)에 올린 육조(여섯 항목)의 상소라는 뜻이다. 68살의 노학자가 17살 어린 왕에게 마음을 다하여 올린 글이 이 상소다. 퇴계는 이 글에서 어떻게 하면 국왕이 성군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는지 힘주어 이야기한다. 반면에 긴급히 처리해야 할 국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마지막 항목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그친다. “국왕이 성군으로 성장한다면 그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퇴계가 임금과 대신과 대간(사간원·사헌부)을 머리, 배·가슴, 눈·귀에 비유해 삼권의 분립과 조화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임금은 나라의 머리요 대신은 배와 가슴이요 대간은 귀와 눈입니다. 셋은 서로가 있어야 완전해지니 실로 나라가 있는 한 바뀔 수 없는 형세입니다.” 임금이 중심에 서되 선비가 함께 정치를 하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율곡은 성군이 나와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점에서는 퇴계와 생각이 같았지만, 당대의 문제를 적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퇴계와 달랐다. <만언봉사>가 율곡의 정치사상과 정책대안을 가장 풍부하고 절실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만언’(萬言)은 ‘1만자는 되는 말’을 뜻하며 ‘봉사’(封事)는 ‘밀봉하여 올린 글’을 뜻한다. 할 말이 많아 그렇게 긴 글을 올린 것이다. <만언봉사>는 선조 7년에 쓴 것인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가 일어나자 선조가 널리 조언을 구하는 ‘구언교서’를 내린 데 대한 율곡의 답변이었다. 이 상소에서 율곡은 ‘괴변’에 대한 진단과 대책을 내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일곱 가지 실질’을 거론하고 그 실질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퇴계가 근본을 강조한 것과 다르게, 율곡은 수신(修身)과 안민(安民)을 동시에 강조한다. 임금이 도를 닦고 덕을 쌓는 것과 함께 법령과 제도를 시대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가·개혁가로서 율곡이 확실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었음을 <만언봉사>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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