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반공 ‘마녀사냥’



틈만나면 '빨갱이몰이' 마녀사냥



15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97년 8월 손바닥 반만한 명함 한 장이 온 나라에 풍파를 일으켰다. 당시 국민회의 이석현 의원이 외국인용으로 제작해 미국에서 돌린 명함이었다. 이 명함이 문제가 된 것은 국호를 영어·프랑스어 등 7개국어로 표기하면서 한자로 한국이라고 쓴 뒤 괄호 속에 함께 쓴 `남조선'이란 글자 때문이었다.

평소 같으면 외국인에 대한 `과잉친절'쯤으로 이해되고 넘어갈 이 `해프닝'을 <조선일보>는 8월21일치 사회면에 명함 사진과 함께 “`남조선 국회의원'/국민회의 이석현 의원 명함 파문”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는 같은 날치 사설(`남조선 국회의원'?)로 이 의원에 대해 극단적 언어 폭력을 가했다.

“우리는 명색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혹 아무 의식 없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 무식과 몰상식에 놀라고 이런 사람을 국민의 대표로 뽑은 사실에 수치감을 떨칠 수 없으려니와 혹 그가 고의로 그런 짓을 했다면 그 사상과 그 노골성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국제화 시대라 외국에 나갈 때 쓰기 위해, 7개국어를 넣은 국제명함을 만든 것이며,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남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한국' 뒤에 괄호를 치고 `남조선'이라고 적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더구나 이 의원은 문제의 명함을 돌리기 전 `남조선' 부분을 두 줄로 그어 삭제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의원의 해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선일보는 같은 사설에서 “이씨의 해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며 “우리를 `남조선'이라 호칭하는 것은 북한이나 친북성향의 해외교포들만에 한정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의원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의 긍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질타했다. 나아가 “국회는 마땅히 이런 무자격 의원의 제명도 불사하는 단호한 징계를 내려야 할 것”이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이 사설은 `남조선'이란 단어 하나만을 꼬투리삼아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대한민국 국민을 모욕한” 엄청난 사건으로 부풀린 뒤 이 의원의 `사상'에 `색깔'을 입혀 정치적 타격을 가한 마녀사냥식 `색깔 공격'의 전형이었다. 이 의원은 조선일보와 신한국당의 잇따른 공격으로 이 문제가 대선쟁점으로 번지자 8월29일 “일부 인사들이 갖고 있는 사고의 극단적 편향성과 지성의 상실을 우려한다”는 말을 남긴 채 눈물을 쏟으며 자진 탈당하고 말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신문들의 `색깔 공격'은 `이석현 명함 사건'말고도 15대 대선 내내 지면을 메웠다. 그 한 예가 `양심수 사면 논란'이었다. 발단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97년 10월 31일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우리가 집권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을 사면하겠다고 한 발언이었다. 김 후보는 이 발언에 이어 “양심수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안 되고, 애국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도, 조선일보는 11월2일치 사설(`디제이 `양심수론''), 11월6일치 사설(``양심수' 재론') 등에서 김 후보의 `사상'에 `의혹'을 제기해 이를 쟁점화했다.

`양심수 사면 논란'에서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빠지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2일치 사설(`누가 `양심수'인가')에서 “김 총재가 염두에 둔 양심수가 혹시 한총련 소속 대학생이나 … 일부 공산주의 관련단체 결성자 등인지도 모르겠다”고 추측을 해놓고는 “그들을 사면할 경우 …안보사태에 구멍이 뚤릴 수도 있다”며 발언의 진의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설에서 “이런 발언을 간헐적으로 하기 때문에 색깔시비가 거듭되는 것 아닌가” 하며 책임을 김 후보에게 돌렸다.

그러나 <조선일보> 등의 양심수 부인과는 달리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인터내셔널)는 이 해 10월15일 대선 후보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양심수에 대한 구금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며 양심수·장기수 석방 등에 관한 대선 후보들의 견해 표명을 요구했다. 또 대한변협도 이 해 9월에 발표한 `96년도 인권보고서'에서 95년 구속된 양심수가 1263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김 후보의 `양심수 사면'을 공격했던 신문들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양심수 사면 발언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국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사상 트집잡기'는 선거 국면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로 안기부가 주도하던 `사상 몰이'가 이전의 군사정권에 비해 한풀 꺾이자 이 땅의 수구신문들은 `공안 업무'를 자진해서 떠맡은 뒤,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정치인·학자들을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마녀재판'을 가했다.

문민정부 초기 그 첫 희생자가 한완상 당시 통일부총리였다. 자유주의적 개혁파로 분류되는 한 부총리는 취임 후로 `이인모 노인 북송' 등 비교적 전향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그 자매지 <월간 조선>은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93년 3월 11일치 사설(``핵'과 우방의 의혹')에서 벌써 한 부총리의 대북화해정책을 문제 있는 것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어 7월11일치 조선일보 김대중칼럼은 한 부총리의 대북화해론을 “나이브한 감상적 통일론”이라고 규정한 뒤 “스스로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사실상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 칼럼에 대해 한 부총리는 “나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다”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으나, 조선일보는 7월21일, 22일, 10월19일치 사설에서 거듭 한 부총리를 공격했다.

나아가 월간조선은 93년 8월호에서 `한완상의 충격적인 대북관'이란 선정적인 제목으로 한 부총리가 `위험한 통일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간조선이 의존한 것은 한 부총리가 한국사회학회장을 맡던 시절 이 학회가 펴낸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에 실린 `한국사회 연구와 한국전쟁'이라는 그의 권두논문이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 책에 실린 여러 견해를 정리한 뒤, 결론으로서 남한의 현실은 비판하면서 북한의 현실은 그렇게 비판하지 않는 일부 진보적 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선 보수적 주장일 수도 있는 논문을 근거삼아 월간조선은 한 부총리의 사상을 `충격적인' 것으로 부풀린 셈이다. 월간조선의 이 기사에 대해 8월17일 전국 21개 대학 사회학과 교수 47명은 공동성명을 내 “학술적 논의를 심각히 왜곡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역행시키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며 월간조선쪽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한 부총리는 이해 12월 개각에서 교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 1월 30일 김대중 정부가 한씨를 다시 교육부총리로 입각시키자 조선일보는 바로 다음날치 사설(`눈뜨면 바뀌는 교육총수')에서 “지나친 친북 인물, 교육부총리 안 된다”는 우익단체의 주장을 빌려 그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뒤 사설과 칼럼 등을 통해 `색칠'을 계속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비판 그물에는 이인제 노동부 장관, 김정남 사회문화수석 등 개혁적인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은 예외없이 걸려들었다. 94년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는 “조문단을 파견할 용의는 없느냐”는 이부영 당시 민주당 의원의 대정부 질문을 문제삼아 대한민국이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며 온 나라를 색깔 논쟁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정치와 직접적 상관이 없는 대학교수도 이 그물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97년 대선 국면에서 벌어진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사건'이다. 사건의 지원은 월간조선의 93년 7월호 기사 `통일원의 이상한 통일 캠페인―통일되면 수도와 나라꽃이 바뀌나'와 9월호 기사 `통일원의 통일캠페인 참고도서에 글을 쓴 두 어린이가 말하는 왜곡·변형의 사례'였다.

이 기사에서 월간조선은 통일원이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광고한 `통일 캠페인'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을 연상케 하고 대한민국 국가와 정통성을 뒤흔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정부가 돈을 들여 용공·이적 표현물을 제작한 셈인데, 월간조선이 이런 주장을 한 근거는 광고에 출연한 농구선수 우지원씨와 미스코리아 한성주씨가 나눈 대화, 가수 이선희씨가 부른 노래 <우리는 하나>의 가사 일부였다.

대화에서 한성주씨는 “통일이 되면 수도는 어디가 될까요? 나라꽃은 무엇이 될까요? 공휴일은 어떻게 바뀔까요?”라고 의견을 물었는데, 월간조선은 이를 “나라꽃이 바뀔 수도 있고 수도 서울이 옮겨질 수도 있으며 공휴일도 바뀔 수 있다”는 단정적인 서술형 문장으로 바꿔친 뒤 통일원이 마치 북한 중심으로 수도와 나라꽃과 공휴일을 바꾸자고 한 것처럼 몰아갔다. 또 “(북한 사람들이) 어렸을 땐 우리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우리랑 똑같더라구요”라고 한 우지원씨의 말을 놓고 “납득할 수 없으며 문제가 있는 발언”이라는 상식 밖의 주장을 폈다.

이 기사는 한발 더 나아가 이 광고에 쓰인 참고도서 중 하나가 이장희 교수가 95년 10월 청소년용으로 펴낸 <나는야 통일 1세대>라는 책이라고 지목하고 이 교수를 물고늘어졌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책 안에서 이미 “최선의 방법은 서울을 수도로 그냥 두는 것이고, 옮기더라도 한반도의 중심이자 한강을 끼고 있는 한반도의 허리부분이 될 것”이라고 밝혔고, 공휴일에 대해서도 “통일이 되면 김일성·김정일 생일은 공휴일에서 빠질 것”이라고 적시했다. 문제삼는 것 자체가 문제인 기사였던 셈이다. 게다가 이 책은 조선일보(95년 11월 24일치) 등의 신간안내를 통해 좋은 책으로 소개했던 책이다.

월간조선은 이 터무니없는 기사에 대한 이 교수의 반론보도문을 두번이나 연거푸 실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월간조선 9월호 보도를 받아 8월29일치 사설(`나는야 통일 1세대')에서 어린이의 글 일부가 삭제된 걸 문제삼아 “정말 어린이의 글을 특정한 시각에서 취사선택한 일은 없는지 지식인의 소신으로 말해야 한다”며 이 교수를 압박했다. 이어 대선 투표일을 20일 앞두고 검찰은 `이적표현 혐의'로 이 교수의 구속영장을 두번이나 신청했으나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3년 2개월의 법정공방 끝에 지난 2월 23일 무효판결을 받았다.

반공을 유일무이한 잣대로 들이대는 수구신문의 진보적·개혁적 인사 공격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로도 계속됐다. 그 하나가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케이스다. 조선일보는 98년 2월11일치 해설에서 경제수석에 임명된 김태동씨에 대해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다'고 그를 비판하는 경제학자들도 적지 않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누가 그렇게 비판하는지는 전혀 거론하지 않은 채 색깔칠부터 한 것이다. 그 뒤로도 조선일보는 김 수석(뒤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재벌개혁론 등이 너무 과격하다며 틈만 나면 공격했다.
한 인물을 두고 좌경이니 용공이니, 사상이 의심스럽다느니, 친북이 아니냐느니 하며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나선 사건의 결정판은 월간조선과 조선일보가 지면을 통해 제출한 `최장집 사상 검증'이었다. 98년 말 내내 온 나라에 중세식 마녀사냥의 장작불을 피워올린 이 희비극적 사건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매국을 일삼던 수구언론이 해방 뒤 친일을 감추고 생존하기 위해 뒤집어쓴 반공이라는 외투를 벗지 않고 고집한 데 따른 역사적 귀결이기도 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92053043.html

사상검증, 논문 앞뒤자르고 “사상 위험”



1998년 10월 월간조선과 조선일보가 터뜨린 `최장집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사상검증 사건'은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낀 언론권력이 한 사람의 학자를 어떻게 정치적·인격적으로 매장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조선일보는 98년 10월 24일치에서 최장집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 6·25를 민족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왜곡·과장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월간조선 98년 11월호에 게재된 `대통령 자문 정책기위획위원장 최장집 교수(고려대)의 충격적 6·25전쟁관 “6·25년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이라는 기사가 출발점이었다. 월간조선의 이 기사는 최 위원장이 93년 펴낸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의 한 부분인 `한국전쟁의 한 해석'에 쓴 구절의 일부를 문제삼아 “6·25전쟁을 평가함에 있어 대한민국 국민에게 불리하게, 북한에는 유리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최 위원장은 10월 20일 “월간조선이 논문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고, 논문의 어휘, 문장을 의도적으로 문맥과 분리인용해 필자의 사상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모해했다”는 내용의 장문의 반박문을 조선일보사에 보냈다. 최 위원장은 또 “논문의 전체 문맥은 전쟁발발의 최종적 책임이 북한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도 월간조선은 논문의 전체 논지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관련 기사를 21일치에 보도하면서 월간조선의 보도내용을 다시 요약해 내보내자, 최 위원장은 23일 명예훼손 혐의로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이 소송사건을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후 거의 두달 동안 사설·칼럼·기고·기사를 총동원해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이 정당하며 최 위원장의 사상이 위험하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런 주장을 내포한 기사 가운데 하나가 26일치 4면에 실린 `한국전쟁 관련 최장집 위원장 논문 발췌'다. 이 기사는 “미군과 한국군의 38선 돌파 `공격적 팽창주의의 발로'/`김일성은 열렬한 민족주의자 민족통일의 사명감 가졌다'/`마치 북의 공격 기다린 듯 미, 전광석화처럼 개입”이란 소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월간조선과 마찬가지로 최 위원장이 쓴 논문을 앞뒤 잘라 문맥과 상관없이 일부만 인용한 데다, 부르스 커밍스 등 다른 학자의 시각을 검토하는 차원에서 인용한 글을 최 위원장의 견해인양 보도하는 행태를 보였다.

조선일보의 상식 밖의 보도가 계속되자 참여연대·민주노총·환경운동연합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조선일보허위·왜곡보도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지식인들의 비판이 잇따랐다. 법원도 11월 11일 최 위원장의 신청을 받아들여 월간조선 배포금지 결정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 결정을 무시하고 계속 관련 기사를 내보내자 담당 판사는 “조선일보사에서 매우 악의적인 보도를 계속하고 있다”며 장문의 조선일보 비판문을 법원 내부 인터넷 통신망에 올리기도 했다.

최장집 사상 검증 사건은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공인의 인격을 훼손한 `언론폭력'이라는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과거와 같으면 조선일보의 논조를 따라갔을 다른 신문 대다수도 중립을 지키거나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쪽에 섰다. 이 사건은 이듬해 1월 19일 최 위원장이 “대승적 차원에서” 소송을 취하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러나 최 위원장은 3달 후 위원장직에서 경질돼 조선일보쪽의 `사상공격'이 결국 먹혀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냉전적이고 반공지상주의적인 시각으로 진보적·개혁적 인사들을 공격하는 언론권력의 행태는 계속됐다. `안티조선운동'은 이런 행태를 참지 못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언론권력 거부운동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4/005000000200104100116832.html

⑧권-언 유착


사주, 무릎꿇고 술올려 



198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과 신문사주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자신의 방미 사실을 언론이 작게 다룬 것에 서운함을 느낀 노 대통령이 다음부터 기사를 좀 크게 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한 초청자리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동동주와 생선회로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사진설명]1988년 12월 언론청문회의 증언대에 선 언론사 사주들. 왼쪽부터 김상만(동아), 방우영(조선), 이종기(중앙), 장강재(한국)씨. 80년 신군부가 벌인 언론통폐합과 기자 대량해고를 5시간 동안 추궁당한 방우영 회장은 뒷날 사보를 통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라 말했다. 한겨레 사진부photo@hani.co.kr

갑자기 ㄱ 사장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하, 제 술 한잔 받으시죠.”
ㄱ사장은 동동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잔에 따랐다. 순간 대통령은 당황했다.
“아니 편하게 앉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ㄴ 사장이 “각하, 각하, 하는 것은 옛날 호칭 아닙니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ㄱ사장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나는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았으니 옛날 식으로 하는 것 아니오. 해방 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 하고는 다르지”라고 응수했다.
ㄴ사장은 “아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너무 어린애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나도 환갑이 내일 모레입니다”라고 화를 내며 위스키 한 병을 따로 시켰다. ㄴ사장은 양주병을 들고 대통령에게 “자, 제 술도 한잔 받으시죠”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미안합니다.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다투지 마시고 즐겁게 마십시다”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지자 노 대통령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노 대통령이 나가자 ㄱ사장은 ㄴ사장에게 화를 냈다. “아니 이 사람, 나는 자네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데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나. 나는 자네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ㄴ사장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버님까지 들먹거릴 필요는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ㄱ사장은 “뭐라고. 아니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너 혼 좀 나볼래”하고 되받았다. ㄱ사장이 ㄴ사장의 멱살을 잡자 ㄴ사장도 지지 않고 ㄱ사장의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것을 다른 사장들이 간신히 말려 술자리가 끝났다.
이날 말다툼의 계기는 회식 때 ㄱ사장이 대통령에게 “방미 기간중 기사가 작게 취급된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면서 “언론계 대표로서…”라는 말을 덧붙여 경쟁신문사인 ㄴ사장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코미디 같은 이 이야기에는 아부와 굴종, 배신이란 언론과 권력의 함수관계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노 대통령은 수십개가 넘는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중에 유독 특정 신문 사주들만 뽑아 이날 청와대 회식자리에 초청했다. 노 대통령은 이 신문 사주들만 잡으면 언론 논조를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노 대통령 앞에서 “방미 기사가 작아서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바치던 사주는 뒷날 자기 회사 사보를 통해 노 대통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참 싱거운 사람이다. 한가지 특색이라면 외유를 선호했고 그때마다 크게 써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면종복배. 살아 있는 권력에는 굽실거리다 죽은 권력에는 발길질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이다.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가 여론시장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언론 자유를 포기하며 누린 독점적 특혜를 무시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정책에는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언론기본법 같은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있었다.

전 정권은 언론통폐합 이후 새 신문사 등록을 아예 불허했다. 경쟁 없는 독점 시장 체제에서 늘어나는 광고 수요는 언론사 사주에게 막대한 경영이익을 보장했다. 광고물량이 크게 늘어나자 신문사들은 지면을 늘리기 위해 윤전기 도입에 나섰다. 전 정권은 82년 1년에 한해 관세법 부칙 개정을 통해 신문사들이 윤전기를 들여올 때 관세를 20%에서 4%로 깎아줬다. 81년부터 87년까지 조선·동아·중앙·한국일보의 연평균 매출액 증가가 약 19%였고, 이들 신문사의 매출액은 6년 동안 2배 이상 늘었다.

권력과 언론사주들의 관계는 박정희 정권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박 대통령은 재임시 1년에 한두 번 의례적으로 신문사 발행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환담을 나누었다. 그가 자주 독대한 언론인은 당시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과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 정도였다고 한다.

족벌신문 사주가 권력의 품에 안길수록 신문은 자유언론과는 멀어졌다. 75년 3월 조선일보 기자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펴자 방우영 사장은 3월7일 `가차없이 처단하겠다'는 사장 명의의 경고문을 회사 안에 붙였다.

“사규에 어긋나는 처사일 뿐 아니라 기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난폭한 수법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끝까지 혁명적인 수법으로 55년의 기나긴 전통을 미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먹칠과 분열을 일삼는 사원이 만의 하나라도 잔재한다면 조선일보의 앞날을 위하여 분명히 그리고 가차없이 처단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자유언론 회복을 위한 자사 기자들의 투쟁을 방우영 회장은 뒷날 사보를 모아 펴낸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분통과 쓰라림과 충돌이 이어진 비극 속에서 조선일보의 치욕의 한장이 기록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방 회장이 요즘 자유언론 수호와 할 말을 하는 신문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누가 방(우영)회장이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소리를 한다면 나는 조선일보 주필의 이름으로 그것을 반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평기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장이 편집국에서 농담처럼 던지는 말 한마디가 그날의 신문제작에 그대로 영향을 끼쳐버리는 참담했던 순간들을…. 편집국의 한 기자는 기자 초년병 시절 편집국에서 목격한 하나의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편집권 행사의 최고회의체로서, 신성불가침한 것으로만 알았던 편집국장 주재하의 부장단회의가 예고없이 방문한 사장의 `고함' 한마디에 풍비박산 나버리는 장면을…. 높고 높게만 보였던 데스크가 저러하거늘 나 같은 졸개 기자야….”(88년 12월28일치 <조선노보>)

얼마전 정치권에서 `제왕적'이란 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신문사 안에서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절대복종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신문사 사주야말로 `제왕적'이다.

지난 3월 동아일보를 떠난 김재홍 전 논설위원은 <미디어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언론사와 사주는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자와 논설위원은 그렇지 못한 게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고 말했다.

“지금은 편집국장, 주필과 생각이 다르면 같이 일할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런데 편집국장과 주필은 사주에 장악돼 있어 제작방침과 논조가 일원화돼 왔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인정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혼재해 있는 신문사가 발전할 것이다. 언론과 독자가 `다양한 의견의 시장'인 것처럼 기자도 마찬가지다. 소속원의 대외활동도 소속 신문사의 논조와 방침으로 규제하려고 해 방송 토론프로그램에 나가서도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분위기다. 허가는 물론 발언 내용까지 알려야 한다.”


실제 지난해 10월3일치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 신문의 한 논설위원 칼럼이 사주의 입김으로 삭제된 것은 족벌언론 안 언론 자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지난해 10월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은 고려대 정문 앞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강을 막는 학생들에게 낮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90년대 들어 한국기자협회나 한국언론재단 등이 벌인 언론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언론 자유의 저해요인으로 정치권력보다 사주를 꼽는 답변이 휠씬 많아졌다. 60·70년대 절대권력의 횡포에 대해 입다물고 80년대 권력에 영합해 이득을 챙기고, 90년대 들어 스스로 권력화한 `제왕적' 사주. 이들의 권력을 그대로 두고 더 이상 자유언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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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자유언론 의지마저 상업주의 도구 이용

1970년대 언론은 민주화 투쟁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유린 등을 외면했다. 자연히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범죄적인' 신문제작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75년 3월6일 제작거부 농성을 벌이다 사주에 의해 해직된 기자들이 만든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는 75년 4월 충격적인 진상보고서를 냈다. 여기에는 <조선일보> 사주가 기자들의 순수한 자유언론 실천의지를 상업주의적 목적을 위해 어떻게 이용하고 배신했는지 담겨 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 투쟁을 벌인 뒤 각 신문사 기자들 사이에 자유언론선언운동이 벌질 때였다. 회사쪽은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적어도 2등은 해야 한다”고 은근히 뒤에서 고무·격려했다. 동아일보와 더불어 이른바 전통 있는 민족지를 자부해온 조선일보로서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칠 때 조선일보 기자들이 침묵할 경우 `사꾸라신문'이란 오해를 받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35년 7월6일 서울 태평로1가 새 사옥 낙성식을 하고 “동아일보는 3층이고 조선일보는 4층이다”는 사설까지 실을 만큼 동아일보에 대한 경쟁의식이 뿌리깊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하고 난 뒤 조선일보 기자들 사이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간부들은 은연중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73년 이미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 수호선언문을 냈지만 조선일보 기자들은 며칠이 지나도 선뜻 단합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사 한 명이 기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선일보 기자들은 왜 용기들이 없느냐”며 은근히 투쟁을 종용했다. 당시 기자들은 이것을 이사 한명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투쟁하라'는 회사쪽의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74년 10월24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자 간부들의 일반적 태도는 “잘들 했어. 2등은 해야지. 동아일보를 바짝 뒤따라 가야지”였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들이 회사가 허용하는 어용성의 한계 안에서 적당히 머물 것을 거부하고 꾸준하게 자유언론을 실천해 가려고 하자 74년 12월 회사는 기자 2명을 해직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회사측이 신문의 생명이라 할 언론자유를 그때그때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반언론적 태도를 즉각 청산하고 본연의 양심과 정도를 되찾아 주기를 간절히 요망합니다.”(조선투위 진상보고서 마지막 문장, 75년 4월11일)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81906031.html


[언론권력] 동아 사주, 청와대 눈치보기 급급 

1974년 12월27일, <동아일보>를 펼쳐든 독자들은 어리둥절했다. 3면 광고란에 익숙한 기업광고 대신 `민주시민'들의 광고게재를 부탁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 피아르 1'이 실렸다.

74년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 광고주들은 뚜렷한 이유 없이 한꺼번에 광고예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7개월 동안 이어진 이른바 광고탄압은 박정희 정권이 기업들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압력을 넣어 신문의 자금줄을 끊어 말려 죽이겠다는 비열한 술책이었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이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등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 뒤 그동안 금기시해온 유신반대 시위와 집회기사를 싣기 시작한 것이 광고탄압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치며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기자들은 정권과 결탁한 사주에 의해 해직되어 동아일보를 떠났다.


광고 탄압이 한창이던 75년 2월 초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이 `자유의 금펜상' 후보로 선정됐다는 전문이 국제신문발행인협회로부터 날아들었다. 동아일보쪽은 `자유의 금펜상'이 매년 세계에서 글이나 행동으로 언론자유 증진에 크게 이바지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언론인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상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민족과 더불어 80년> 동아일보사)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의 한 관계자는 사주인 김상만 사장이 광고탄압에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가 부족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시민들의 성원 광고를 부탁한 `동아일보 신문광고 피아르 1'이 나간 74년 12월27일 오후 김상만 사장과 이 관계자 사이에 오간 이야기다.


“이게 뭐냐?”
김 사장은 피아르 1 광고가 실린 27일치 신문을 내놓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신문의 자유는 광고의 자유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 기본논리를 풀이해 독자들에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청와대가 지금 발칵 뒤집혔어.”
“아니 청와대가 발칵 뒤집힐 게 아니라 청와대가 손을 들어야죠.”

김 사장은 한참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이거 또 하느냐”고 물었다.
“박 정권이 손 들 때까지 해야죠. 계속 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 김 사장은 “다음에 (광고) 나갈 때는 이사인 판매국장의 결재를 받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속으로 `사주가 싸우는 데 제동을 거는구나. 결재를 맡으라고 하니 결국 하지 말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김 사장은 “사장의 명령이다. 앞으로 결재받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관계자는 그때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하겠다'는 말 대신 `알겠다'고 하고 사장실을 나왔는데 속에서 울컥 올라왔어요. 아무리 사주라고 하지만 지금 동아일보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사람을 격려는 못할 망정 처벌하겠다니…. 이게 동아일보 사장이냐, 장사꾼이지. 정말 괘씸했어요.”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81914030.html

⑦ 5·6공 왜곡보도


5.6공 안보상업주의 '굽은 펜'



1986년 10월 30일 당시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충격적 발표를 했다.

“2백억t의 물을 담은 북한 금강산댐이 붕괴될 경우 화천 등 5개 댐을 순식간에 차례로 파괴하면서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 강원 경기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황폐화시키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른바 `평화의 댐' 오보의 시작이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모든 신문들이 `63빌딩의 절반이 가까이 물에 잠긴다'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 `원폭투하 이상의 피해' 등 정부의 발표에 장단을 맞추어 해설 사설 등 지면을 총동원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대로 당할 수 없다'며 규탄시위가 줄을 잇고 평화의 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신문과 방송은 어린이 저금통까지 털어 성금 참여를 독려하는 모금운동을 펼친 결과 740억원의 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평화의 댐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88년 8월 1일치는 “평화의 댐은 불신과 낭비의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고 비꼬았다.
93년 6월 감사원이 전면특감에 들어가면서 평화의 댐은 완전히 조작된 정보에 의해 꾸며진 허구임이 드러났다.

5공 정권이 엉터리 금강산댐을 들고나온 배경은 86년 대통령 직선제 요구로 뜨겁던 개헌정국을 돌리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었다. 줏대없는 언론이 정권안보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6년 6월에 터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정권의 부도덕성과 함께 타락한 언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시위 참가 여학생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경찰관이 상상도 힘든 못된 짓을 한 사건을 놓고 언론은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검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조선일보는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 폭행만 했다'(86년 7월17일치)는 검찰 발표문을 제목으로 뽑았고 나아가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이란 제목도 등장했다. `부천서 사건-공안당국의 분석'(86년 7월7일치 조선일보)에서는 “급진세력의 투쟁전략 전술 일환-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고 사건의 성격을 악의적으로 규정하고 중앙일보도 `성 모욕행위는 없었다'(86년 7월17일치)이란 검찰 발표문을 제목으로 뽑았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7월18일치 사설 `부천사건에서 얻는 것'은 “이 시점에서 수사권 밖의 사람이 진실이 어떻했는가를 가릴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성고문 보도를 왜곡보도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이 낸 <조선노보>에 따르면, 보고서를 읽은 조선일보 기자들은 `표현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 신문 제작 책임자선에서는 “이 보고서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은) 동아일보 해직자들 작품이다”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다.

“작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발생 당시에도 편집국 내에선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며 `보호해 줄 가치가 없다'는 애기가 오갔었다.”(87년 7월18일 조선일보 사회부 평기자들의 `조선일보 편집에 관한 의견서')
피해자인 여학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성고문 사건을 고발했는데도 이를 왜곡한 대다수 언론인들은 권력이 주는 뒷돈까지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검찰출입기자들은 난데없이 두툼한 봉투를 나누어받았다. 당시 당국이 은밀히 밝힌 봉투의 내역은 통상적인 여름휴가비에다 법무부장관 취임 1주년 인사비가 합쳐진 것으로 전해졌다.”(88년 12월17일치 <경향신문>)

고문사건에 대한 굴절된 보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85년 10월29·30일 각 신문은 서울지검이 발표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정'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 민추위사건을 보도하며 민추위 사건 배후로 발표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인 김근태씨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강조했다.
10월30일치 중앙일보는 검찰이 만들었다는 `북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과 `민주주의 민족민주혁명론'을 비교하는 표를 싣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검찰의 민추위 수사가 뜻하는 것'이란 기사에서 “직업혁명가를 자처하는 일부 재야단체 인사들과 과격운동권 학생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절단하는 작업이야말로 순수한 학생·근로자를 보호하고 사회안녕질서를 위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발표문인지 기사인지 구별이 힘든 대목이다.

공안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기던 언론은 김근태씨가 법정진술을 통해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88년 2월15일 서울고법은 김씨에 저지러진 고문사실을 인정하고 경찰관 4명을 재판에 회부키로 결정했다. 85년 당시 검찰이 발표한 김근태씨의 범죄사실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벌인 고문의 결과임이 밝혀졌다.
고문에 대한 조선일보의 얕은 문제의식은 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찰관 2명이 구속 수감될 때도 나타났다.
경찰은 수감되는 동료를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 똑같은 방한복과 방한모를 입은 동료 경찰관 10여명을 함께 승합차에 태웠다. 10명의 사내들이 차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각 신문에 실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를 고발했다.

조선일보도 이 모습을 찍었지만 끝내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그날 밤 이 사진에 대해 `당신들은 동료가 구속되면 감싸주는 인정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 떨어졌고 결국 신문에 나가지 못했다.”(조선노보 89년 6월8일치 호외)

86년 11월 김일성 주석 사망 오보는 `안보상업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북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소문이 15일 나돌아 동경 외교가를 한동안 긴장시켰다. …이 소문의 내용은 중공국가 주석 이선념이 지난달초 평양을 방문하기전에 북한군 일부에서 김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암살기도 가담자들은 중공으로 도주했으며 북한이 중공측에 대해 이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해 오던 중 이 사건에 가담했던 나머지 일파들이 결국 김을 암살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

86년 11월 16일치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 기사는 단지 소문을 전달했을 뿐이다. 처음 ‘피격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조선일보는 이틀 뒤인 18일부터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했다. 신문 12면중 7면을 관련 기사로 채운 조선일보는 `주말의 동경급전… 본지 세계적 특종'이라 자화자찬했다.

조선일보의 보도 이후 연일 신문들은 `열차에서 총을 맞았다' `폭탄에 당했다' `쿠데타가 발생했다' 등 추측으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18일 오전 김 주석이 평양공항에서 외국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이 북한 텔레비전에 나왔다. 조선일보의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오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숱한 북한 오보에서 그랬던 것처럼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식으로 버티며 독자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되었다”고 쓰면서 책임을 엉뚱하게 북한에 떠넘겼다.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도 조선일보는 왜곡 보도를 했다. 문 목사가 평양방문 뒤 베이징에 도착해 한 기자회견을 보도한 조선일보 89년 4월5일치 제목은 `문씨 “돌아가고 싶지 않다”'였다. 문 목사의 가족들은 5월2일 언론중재위에 조선일보의 기사제목 중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부분은 “솔직히 말해 귀국 후 감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부분을 왜곡한 것이라며 중재신청을 했다. 문 목사는 베이징 기자회견 당시 “귀국후 구속되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모처럼 뚫린 남북의 대화 통로가 막히지 않도록 이번만은 감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나 조선일보가 기사본문에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라고 보도하면서도 정작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을 명시하지 않아 의혹을 사게 하고 나아가 제목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표시해 문 목사의 신념을 의심케 했다고 주장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시기 왜곡과 곡필은 비단 지면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사주들의 모습 또한 지면만큼이나 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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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문공부 '시시콜콜' 보도지침



신문에서 사건의 취급 여부, 기사의 방향, 크기 어느 면에 배치할 것인가를 누가 결정할까. 편집국장과 기자가 판단할 이 일을 1986년까지 정부기관인 문화공보부에서 사실상 전담했다.

문화공보부로부터 보도지침을 받아 적어 보관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원본(1986년 7월 17일치)의 사진. '취재보도 불가''일절보도 불가' '꼭 실어줄 것'등의 말이 보인다


전두환 정권 때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날마다 특정사안에 관련해 신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비밀통신문'을 언론사에 내렸다. 80년대 언론통제의 구체적 물증인 이른바 `보도지침'이다.

예를 들어 86년 7월17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은 다음과 같다.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문화공보부는 오직 권력의 이해관계란 기준에 따라 모든 중요 사건에 대해 `보도 가' `보도 불가' `절대불가'의 판정을 마음대로 내렸다.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 보도지침은 86년 9월16일 발행된 <말> 특집호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한국일보)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한편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언론협조사항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장이 통상 국가적 기밀사항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언론보도에 신중을 기해 줄 것을 언론사에 요청한 경우, 그 요청을 받은 언론사는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사실보도에 참고해 오는 것이 국내외 언론계의 관행으로 되어 있음에도…”라며 보도지침의 본질을 호도했다.

기소된 언론인 3명은 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캐나다 신문협회, 김수환 추기경 등 나라 안팎에서 구속 언론인 석방 촉구가 줄을 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를 상징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역들은 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으며 김주언 기자는 현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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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는 사주의 보도지침

1991년 가을 <동아일보> 편집국에서는 이른바 `신판 보도지침'이란 괴문서가 돌았다. 80년대 보도지침은 정치권력이 만들었지만 90년대 보도지침은 언론권력이 만들었다.91년 9월 6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취임식에서 김중배 국장(현 문화방송 사장)은 이 보도지침을 지칭하며 자본의 언론통제를 경고하고 사표를 던졌다.

김 국장은 “90년대 들어 언론이 이제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제약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동아가 취한 일련의 인사조치와 국장 경질 뒤 자유로운 편집을 제약하고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는 일명 `보도지침'이란 괴문서가 사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침묵하는 기자들에게 신문자본과의 싸움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며 해직이 아닌 사직이란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기자협회보>에 `숨은 권력과 편집국 민주주의'를 기고해 발행인의 편집권 유린을 비판한 손석춘 기자도 같은 날 사직했다. 술렁이던 편집국 기자들은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발행인과의 대화'자리까지 마련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은 자신의 제2창간 편집방침을 정리한 문건을 사내에 돌렸다.

“…동아가 사회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고 또 극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에 의한 체제의 성토광장으로 이용될 소지나 우려를 준다면 이 기회에 제2의 창간의 뜻을 분명히 해야겠다.…근래 우리 지면에 특히 서평란(예:윤정모 책, 폴 바란 책), 난맥 매듭 풀자(안병욱), 자전수필 필자(빈민운동가)의 선택이나 그들 말의 인용 등은 동아를 아끼는 독자의 빈축을 사고 있을 뿐 아니라 동아의 노선을 의심할 정도의 비판이 있음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체제부정이나 국민의 위화감 조성에 지면을 할애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보도지침'이라 부른 이 문건은 편집권에 대한 사주의 자의적 판단과 전횡 의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91년 동아사태는 그동안 독재권력 뒤에 숨어서 사실상 신문제작을 좌지우지해온 사주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실체임을 드러냈다는 의미가 있다. 동아일보 쪽의 의미축소와 다른 언론사들의 침묵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드러난 신문사주의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대부분의 족벌신문들 내부에서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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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5공정권 미화·찬양

[언론권력] 조.중.동,전두환 용비어천가

“광주난동 극복 새시대 기수”
“의리.정직의 지도자 ‥군 개입은 당연” 
각신문 너도나도 신군부 나팔수 노릇 
“12.12는 대승적 윤리 ““전씨집권 새시대” 
핏빛행보 쓸고닦고‥모든 움직임 대서특필 

1980년 민주화의 봄을 피로 물들이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까지 일등공신은 단연 언론이었다. 언론은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 가리기, 군의 정치개입 지지, 전두환 개인미화와 `영웅담' 유포로 대권가도를 닦아주어 한국 언론사상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런 보도태도는 광주항쟁에 대한 왜곡보도가 극에 달했던 80년 5월부터 전두환씨의 전역과 대통령 당선이 함께 이루어지는 그해 8월까지 절정을 이룬다.



[사진설명]“무정부 상태의 광주 …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탈취한 군트럭으로 과격파들이 거리를 무질서하게 누비고 있다.”(위) 1980년 5월25일치 사회면 머릿기사로 실린 현 <조선일보> 주필인 김대중씨의 광주 르포 기사에는 이런 내용과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인간 전두환” 등 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뒤부터 언론은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씨를 `민족의 새 지도자'로 찬양하기 시작했다(아래)


광주항쟁에 대한 첫 보도는 5월22일, 그것도 계엄사의 발표(21일)가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주필 이진희)은 이 날치에 이미 이를 `안보적 중대사태이다'라는 제목의 사설로 다루고 있다. 이 신문은 사건자체는 일체 보도하지 않은 채 23일치 1면에 `북괴방송 광주사태만 집중적 선동' 기사를 실었다.


<중앙일보>는 5월19일치 `자제와 화합으로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는 사설을 통해 “…이런 시점에서 보면 계엄령의 확대 시행은 그 목적이 사회질서, 사회 활동의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일 수 밖에 없다”고 5·17조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조선일보>도 나섰다. 25일치 사회면 `무정부상태 광주 1주…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 제목의 머릿기사는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트가 처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보도했다. 민주시민을 `난동자'로 몬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당시 사회부장으로 현재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다.


특히 조선일보는 같은날 사설 `도덕성을 회복하자'에선 “…비극의 나라를 우방으로 둔 그 나라(미국)에 대해서 목하 거추장스런 짐이 돼있는 우리로선 당혹스런 착잡한 심정마저 누를 길 없다”며 학살당하는 광주시민보다 미국에 누를 끼친 데에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언론의 이런 일방적 보도는 87년 6월 항쟁때까지 광주를 금단의 영역으로 남게 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8월4일 전국 불량배 일제 소탕 방침을 발표하면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실권자로 신문의 1면 머릿기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8월5일자 사설 `사회악 수술에 대한 기대'에서 “국보위의 이번 조치에 대한 기대는 바로 심층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에 대한 기대”라고 적고 있다.


석간이었던 중앙일보는 8월4일 사회면 머릿기사로 `주먹서 풀려난 유흥가 뒷골목'을 올려놓는 신속성을 보인다. 중앙일보는 또 문인 조연현씨를 등장시켜 `깡패소탕은 지속적으로'를 강조하고 `폭력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어 7일 조선·동아·중앙은 물론 모든 신문들이 전두환씨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인사말을 1면 머릿기사로 일제히 보도했다.
특파원과 외신보도도 전씨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켜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개인에 대한 미화작업의 물꼬는 <경향신문>이 터뜨렸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김길홍 기자)이란 제목으로 이 신문이 8월19일부터 3회에 걸쳐 연속기획을 내보낸뒤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인간 전두환' 찬양시리즈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기사에서 전씨를 “서릿발같은 결단력 뒤에 훈훈한 인정”이 있으며 “사생관이 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을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어 나온 조선일보의 기사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8월23일자 김명규 기자)'는 가히 압권이다. 이 기사는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으며,“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스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12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쪽에 서면 개인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이미 고인이 된 대통령의 억울함을 규명한다고하여 누가 알아줄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익혀온 양식으로선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접·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철저히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길이었다.…그의 판단은 육사 선후배라는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대승적 윤리관에서 내려진 결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0·26사태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고 미화했다.


같은 날자의 조선일보 사설은 더욱 노골적이다. `전두환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한 전군지휘관회의'에 대해 “국민 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 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불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 다음날인 8월24일치 조선일보의 통단사설 `길-새로운 길잡이가 나타나는데 붙여'에서는 궤변으로 군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하고 신군부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사설은 “어떠한 국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군인만은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오로지 군사적인 임무에만 전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데에는 분명히 사고와 인식의 맹점이 있다.…군이 안보의 견지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며…군이 진일보하여 나라의 강력한 구심체를 형성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있어서 현실을 사는 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새 시대 개막과 새정치'라는 정치부 기자 좌담기사에선 전 장군의 전역을 `파워 엘리트 교체'로 규정하고 `가장 잘 훈련·조직된 군부엘리트, 도덕성·성실성 높고 추진력 강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국일보>가 8월23일부터 상·중·하로 연재한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전역까지'(한국일보 하장춘 김훈 이연웅 장명수 기자), 중앙일보가 8월27일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 이후 8월28일부터 4차례에 걸쳐 실은 `솔직하고 사심없는 성격 전두환 대통령 어제와 오늘- 합천에서 청와대까지'(전육 이석구 김재봉 성병욱 기자), 동아일보가 8월29일 실은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우국충정 30년-군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관 '(동아일보 최규철 기자) 등은 제목만으로도 기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찬양시리즈가 조금 늦었던 중앙일보는 서종철 전국방장관을 등장시켜 `내가 아는 전두환 장군'(기록 권순용 기자)을 실었다. `혈연·지연 거부는 천성적'이란 제목을 단 이 글에서는 “솔직 담백하고 청렴결백했던 전 장군은 공사가 분명했다.…군에서 전 장군은 자리를 옮겨도 흔히 말하는 자기사람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전두환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사에 앞서 공을 그리고 나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인물로서 전 장군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방법을 3분의1만 흉내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의 통설”(조선일보), “전두환에게서 높이 사야할 점은 아무래도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의 자세로 사람치고 대개가 물욕에 물들었지만 그는 항상 예외”(동아일보), “ 견인분발의 인내심, 물욕에 대한 초탈, 체질화된 서민의식, 도덕적 겸허주의,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의 덕성…`양담배 한갑'정도의 부조리도 참아넘기지 못하고 바로 잡았던 `원칙장교'”(한국일보)로 포장됐다. 과연 신문에 실린 글인지 위인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 한국일보(9월2일자)는 `긍지와 정성의 군인가정-이순자 여사를 통해 본 사생활의 면모'(장명수 기자)에서 “청와대의 새 가족은 그 어느때보다 `젊고 화목한 청와대'를 꾸며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이씨의 `가계의 지혜'까지 소개하고 있다.


전두환씨와 5공정권에 대한 찬양은 물론 80년 5월과 8월에 그친 것은 아니다. 5공 내내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서특필되었고 미화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구 찬양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정권교체와 함께 사납고 날쌔게 돌변한다. 특히 조선일보의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전두환은 `민족사의 부정적 인물' 3위로 꼽혔다. `정의사회 구현'과 `민주주의 완성자'로 칭송되던 그가 졸지에 민주주의 파괴자로 낙인찍혔건만, 5공 나팔수였던 언론 대다수가 지금까지 과거에 대해 반성과 참회없이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51845021.html


[언론권력] 언론계 짙은 전두환그림자

영달출세냐,해직옥고냐 

언론계 짙은 전씨그림자 
찍힌 635명 거리로 ‥아부자들은 권부에, 금배지에 



전두환씨의 등장은 언론계를 양극으로 갈라놓았다.
철저히 전씨에게 아부하고 부화뇌동하는 도구로 언론을 타락시킨 기회주의자들은 출세를 보장받았다. 줄줄이 정계로 화려하게 진출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검열철폐를 부르짖던 언론인들에게 전씨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고 5공은 기나긴 암흑기였다. 


[사진설명]“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조선 80년 5월25일치), “북한은 오판 말라”(동아 〃 5월26일치), “곁에 수상한 자 없는가, 서로 펼쳐야 할 방첩사상과 대공활동”(한국 〃 5월29일치) 등 언론에게 광주민주항쟁은 간첩 등 불순한 배후세력이 짙게 드리운 학생·시민의 소요, 폭동, 난동이었다



1980년 5·17조치는 이런 편가르기의 분기점이었다.


5·17조치 이후 구속된 언론인은 모두 24명이다. 이중 실형선고를 받은 언론인은 19명. 5월17일 자정을 기해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들과 함께 언론자유투쟁의 주도자로 지목된 기자협회의 임직원은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정교용(중앙일보)·이홍기(한국방송공사)·이수언(부산일보)부회장과 감사 박정삼(서울경제), 편집실장 김동선씨와 편집실 기자 안양로씨 등이다. 노향기 부회장(한국일보)은 피신했다가 뒤에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김태홍(기자협회장), 노향기, 박정삼, 김동선, 안양로씨 등은 실형선고를 받고 1년여씩 복역했다.


한편 광주항쟁 취재기자들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체포된 사건도 있었다. 심송무(동아일보), 박종렬(동아방송), 오효진(문화방송), 노성대(문화방송)씨 등이다. 이 가운데 노성대씨를 뺀 세 명은 광주항쟁 당시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로 서울로 돌아와 취재내용을 발설했기 때문에 구속됐으며, 노씨는 간부회의에서 “광주사람들이 왜 폭도냐”고 발언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밖에도 5월17일 밤에는 송건호씨, 천승준(동아방송 방송위원)씨가 체포됐다. 옥고를 치룬 언론인들만 아니라 80년 강제 해직된 언론인 933명에게 80년은 악몽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불행과 비극은 보안사와 문화공보부가 애초에 언론사에 통보한 해직자수 298명에 비해 무려 635명이나 차이가 난 사실에서 드러나듯 군사정권뿐 아니라 언론사 사주나 고위 인사들의 부도덕성을 빼놓을 수 없다.


88년 5공비리 언론청문회에서 당시 특위의 조세형 위원은 허문도씨가 광주항쟁을 무력진압한 뒤 한달도 채 안된 80년 6월 중순 한국방송공사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언론의 역할'을 규정했다고 밝혔다. “통일때까지 또는 안보가 100% 이상이 없을 때까지 군이 집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방송기관을 비롯한 보도매체는 독일 `괴벨스'역할을 해야한다.” 한국언론이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허씨는 당시 실력자였던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비서실장을 맡으며 등장했다. 7명중 4명이 언론인이었던 국보위 문공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5공 청문회 당시 “언론 통폐합의 발상과 입안에 관한 한 나의 책임이다”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다.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허씨는 청와대 정무비서관, 문공부 차관, 정무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을 거치며 고속출세한다.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이원경 합동통신 회장, 이진희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손세일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은 국보위 입법회의에 입법의원으로 참여했으며, 방씨는 88년 5공 청문회에서 “대표적 악법인 언론기본법이 제정될 때 한번 항의라도 했어야하는 것이 언론인으로서 떳떳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질책을 받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두환 찬양시리즈를 `특종'해 다른 신문의 경쟁적 베끼기를 유도한 경향신문 정치부장대우 김길홍 기자는 82년 언론담당 2급서기관, 84년 1급 비서관을 거쳐 6공때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거듭 변신했다.


80년 4월21일자 서울신문에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는 시론을 쓴 것을 계기로 전씨와 독대한 이진희씨는 그 뒤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이 됐으며 82년 5월21일 문공부장관으로 취임한뒤 86년 다시 서울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하는 등 정관계와 언론계를 넘나들었다.


81년 3월25일 치러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정당 후보로 입후보해 금배지를 단 언론인은 모두 28명. 이 가운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곽정출씨를 비롯해 모두 21명이다. 80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최병렬씨 등 8명도 12대 국회에서 민정당에 합류했다. 분명 두 길 중 어디를 택할 지 선택의 자유는 있었던 셈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51902022.html

⑤박정희 정권과 밀월

[언론권력] 조·중·동 유신체제 앞다퉈 찬양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앞둔 1967년 당시 신문사들은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18%의 낮은 금리를 적용받았다. 신문 용지에 대해서도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이 적용됐으며, 저리의 차관 대출 특혜까지 누리고 있었다. 일반 사기업에선 엄두도 못낼 혜택이자, 독재정권이 신문들에 베푼 `당근'이었던 셈이다.



<조선일보>는 신문사 사옥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67년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상업차관으로 4천만달러를 들여왔다. 경제개발 초기인 당시 도입 자체가 특혜인 차관을 관광호텔 건립에 배정하는 것에 경제기획원 실무 담당과장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리아나호텔 상업차관은 외자도입 허가 서류에 실무 담당과장의 서명 없이 허가가 난 전무후무한 사례로 알려졌다.


당시 조선일보 방우영 발행인(현 회장)은 68년 3월15일치 <기자협회보> 인터뷰에서 코리아나호텔이 완성될 예정인 70년을 “조선일보 비약의 해”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비약의 해'를 앞두고 3선 개헌이 있었고, 조선일보는 이를 본격 옹호하기 시작했다.


69년 10월17일 박정희 군사정권은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이어 투표율 77.1%에 3분의 2가 조금 넘는 찬성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투표를 하루 앞두고 조선일보는 “`영광의 후퇴'보다 `전진의 십자가'를, `나는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번 더”라는 낯뜨거운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여기서 11명의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 한국'이란 제목으로 “건설 중단은 혼란만 초래” “안보 위해 정치적 안정을” “정국의 안정이 제일조건” “대외적으론 국위선양” “훌륭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등으로 보도했다.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노골적인 부추김이다.


국민투표가 끝난 뒤인 19일엔 사설 `국민의 심판은 끝났다―다수결에의 복종과 함께 소수파도 존중'에서 “비록 치열한 반대세력이었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의 원칙대로 이제는 다수결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헌 과정의 잘잘못을 가리기는커녕 아예 논쟁을 덮자고 한 것이다.


3선 개헌이 이뤄짐에 따라 71년 4월27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24일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조선일보를 찾았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가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폭로한 것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방우영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후락은) 환담중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채 주필이 `3선만 하고는 더이상은 안 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이번만 하고는 다시는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약 3선으로 그쳤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딱 한번만 더'라는 묘수까지 가르쳐 줬던 조선일보는 유신을 찬양했다. 그것도 정권의 압력에 못 이기는 척도 아니고 드러내놓고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국민의 의표를 찌르는” 유신 발표 다음날인 72년 10월18일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란 사설에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한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한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 “비상 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썼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정치체제 개혁'을 통해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 …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라며 “우리는 박 대통령이 비상한 결의를 갖고 대담한 체제개혁 행동을 취하게 된 충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고 적었다. “국민은 경거망동을 삼가하고 일체 혼란의 발생을 자진해서 억제토록 해야 할 것”이라고도 썼다. 유신 조처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비상계엄 선포의 의의'란 사설을 통해 다른 신문보다는 조금 완곡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유신에 대해 “평화지향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이라고 썼다.


조선일보의 찬양은 계속된다. 10월28일 사설 `유신적 개혁의 기초―민주주의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헌법'은 “발의측의 문제의식이 이렇듯 왕성하고 과감한 개혁이 담긴 개혁안을 우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체육관 선거'의 토대를 닦았던 대통령 직선제 폐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에 대해선 “대통령을 직접 선거함으로써 빚어졌던 여러 가지 폐해와 부작용을 일소할 수 있게 된다”고 썼다. 대통령이 전제군주의 권한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알맞게 강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일보> 역시 같은 날 고딕체로 강조한 사설 `국가의 안태를 바라는 뇌리에―왜 지금 헌법을 고쳐야 하는가, 왜 강력한 대통령이 필요한가'에서 유신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박두하는 선거의 견제를 받는 대통령이 민족 역사상의 최대과업을 완수하기에는 너무 짐이 무겁다고 본다. … 선거로 시작되어 선거로 끝나는 대통령으로서는 침착하게 자기 경륜을 펼 사이가 없다”는 것이다.


계엄령 아래에서 반대운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치러진 유신헌법 국민투표에 대해 조선일보는 11월23일치 `새 역사의 출발'이란 사설을 내보냈다.


“그 어느때보다 압도적인 지지와 찬성을 나타냈다. …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박정희씨를 단독후보로 뽑은 것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에 합당한 후보인물을 추천하는 절차를 다 한 것으로 알고 있다”(72년 12월23일치)고 주장했다.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는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 우리는 더욱 전망적인 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국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탁월한 영도자를 가졌다”(12월28일치 사설)라고 거듭 찬양했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와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최대과업의 완수.' 그것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당시 신문들이 유신을 찬양하며 대통령에 전제군주의 힘을 몰아주자고 외친 논리였다. “아시아의 질서는 미일의 중공 접근 내지 수교로 안정체제의 균형이 깨어질 것으로 판단 … 이 중대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자위적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게 조선일보의 주장(10월28일치 사설)이었다. 냉전체제에 찾아온 해빙 분위기를 독재 옹호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지금의 상황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정착, 나아가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에 맞닥뜨려 있다. 하지만 언론권력은 남북관계 개선이 막상 현실화하는 요즈음 오히려 이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신 찬양을 비롯해 74년 1월8일 `유신 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거나 헌법 개폐를 주장·발의·제안·청원을 할 경우 영장없이 구속하고 15년 이하의 징역을 살리고 비상군법재판에서 처단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됐을 때도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침묵을 지켰다. <경향신문>도 같은해 1월10일 사설 `시련 극복을 위한 집약치의 단단―박 대통령의 긴급조치 선포의 의의'에서 “우리는 박 대통령의 이같은 긴급조치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조치 선포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88년 <한국일보>는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한 집단의 순위'에 대한 여론조사(8월17일치)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학생 42.2%, 야당 19.9%, 재야 11%, 여당 10.8%였다. 신문을 비롯해 언론이 민주화에 공헌했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6/2001/009100006200104041852001.html


[언론권력] 국제언론기관 이용 시절따라 입맛따라 

`자기 입맛에 맞게 국제 언론단체 이용하기'

1999년 10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사 사장의 탈세·구속 사건 이후 현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국내 신문들이 툭하면 국제 언론단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돼 버렸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며 국내 신문들을 통제하던 67년 4월 국내 신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해괴한' 모습을 보였다.


제6대 대통령 선거일(67년 5월3일)을 앞두고 4월7일 신문의 날을 맞아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기관에 상주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민당은 국제언론인협회(IPI)와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에 `한국 정부의 언론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등에 격려문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신문들은 일제히 신민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4월7일치 `신민당에 충고한다-언론의 권위를 선거에 이용 말라'란 사설에서 `언론단체에 관한 모욕적 표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같은날 <중앙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한국 언론의 자주성을 얕보고 언론을 병신 취급하지 말라”고 공격했다. <한국일보>도 `신민당은 언론 불신을 조장 말라'란 사설에서 `국제언론인협회나 통일부흥위원단에 소명서를 제출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꾸짖었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기관에 상주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신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터무니 없는 악선전'이라고 잡아뗐고,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는 언급을 회피했다.


정부 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 등 정권의 압력을 막기 위해 나선 신민당을 오히려 공격한 것이다. 국제 단체에 국내 언론 문제를 가져가는 것 역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은 그나마 봐줄 만하다. 최근 보여온 `사대주의적 모습'과는 그나마 다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홍석현 사장이 탈세·구속 사건이 벌어진 99년 10월 홍 사장이 부회장으로 있던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사건을 국제언론인협회 본부에 보고했으며, 조선일보 역시 2000년 2월 도·감청 문제에 관한 사설이 검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1억8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이 사건을 직접 보고한 것으로 언론계에 알려져 있다. 그 뒤 국제언론인협회는 홍 사장 구속은 `언론탄압'이라는 식의 중앙일보 주장, 손해배상 판결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그대로 중계하는 내용의 편지를 한국 정부에 보내온 바 있다.


신민당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이 해괴한 반응을 보이고 나흘 뒤인 67년 4월11일 <동아일보>는 그나마 이성적인 사설을 실었는데, “상주란 생각할 수 없으나 빈번히 출입하는 것은 사실이오”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이렇게 덧붙인다.


“국제기구에 언론 문제를 언론과 상의 없이 먼저 제기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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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5·16 쿠데타 정당화 앞장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인 5월19일 군사정권은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는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그 발행인인 조용수 사장을 `용공'으로 몰아 구속했다. 국내·외 문단 및 언론계 인사 104명, 일본 펜클럽 등의 탄원에도 아랑곳없이 같은해 12월22일 조씨를 처형했다.

23일엔 전국 언론사 916개 가운데 일간지 39개(중앙일간지 15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 남기고 모두 폐간했다.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폐간 직후인 5월26일 <동아일보>는 쿠데타와 직후 벌어진 일련의 조처들을 정당화한다.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라는 사설에서 “5·16 군사혁명이 민주적이냐 또는 합헌이냐 혹은 지휘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의 논의는 이미 기정사실화한 이 혁명을 반공, 민주건설을 향해 이끌고 나가야 할 이 단계에 있어서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보다 한발 앞서 민족일보가 폐간되던 5월19일 `제2단계에로 돌입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하여'(사진)란 사설에서 “군사혁명은 …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군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고 썼다. “확실히 없었던 것만 못한 불행한 사태”(5월16일치 사설) 또는 “법질서에 의하지 않은 이러한 사태가 민주주의의 본도가 아니라는 것”(5월17일치 사설) 등과 같은 주장에서 확 돌아선 것이다.


조선과 동아는 이후 65년 창간된 <중앙일보>와 함께 3선 개헌과 유신의 나팔수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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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재벌신문의 태생적 한계

[언론권력]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 언론계에는 소비재 수출 주도형 경제개발과 이에 따른 광고시장 확대, 신문사간 경쟁 격화를 배경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민족적 친일 곡필로 얼룩진 언론사에 또 다른 곡필의 흐름이 가세한다. 삼성이 창간한 신문 <중앙일보>가 소속 재벌의 치부를 적극 감싸고 돈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국내 첫 `재벌신문'인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됐다. 중앙은 정치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병철씨가 그 대신에 만든 것이다. 1986년에 출판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전기 <호암자전>은 중앙의 창간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기업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해 정부운영과 국가방위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됐다. 이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려는 듯, 창간과 함께 중앙은 삼성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물량공세를 폈다. 무가지를 총 발행부수의 27%까지 늘리고 1967년 당시 국내 초고속 윤전기 8대 가운데 5대를 보유하는 자본력을 뽐냈다. 설립 뒤 5년간의 적자를 내면서도 판매 경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삼성의 자본력이었다.


재벌신문의 폐해에 대한 우려는 채 1년도 못돼 현실로 드러났다. 66년 5월24일 벌어진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부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원을 부과했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국내 굴지의 재벌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던 터였다.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은 중앙이란 재벌언론이 `밀수'를 옹호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밀수가 얼마나 으뜸가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는지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밀수, 그것은 곧 망국이다.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흉악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럽고 끔찍스러운 범죄 …또한 5·16 이후 이 망국행위를 근절키 위해 특별입법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어떤 밀수항목에게는 사형을 언도한 일까지 있다.”(동아 66년 9월16일 사설 `삼성재벌의 밀수')


같은해 9월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이 밀수사건이 세상에 폭로되자, 중앙은 삼성쪽 해명 논리를 연일 지면을 통해 쏟아부었다.


9월16일치 3면에 `사카린 밀수보도/ 사실과 다르다'는 제목 아래 `직원 개인의 비행이다, 기재 도입에 부당삽입, 즉각 적발 자진신고 했다, 이미 5월에 의법조치' `불미한 행위 회사선 몰랐다'라고 보도했다. 다음날에도 7면에서 당시 부산세관장의 말을 빌려 “정당절차 따라 처벌했다, 밀수품 아니며 내 책임하에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같은날 사설 `기업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도 “이번의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도 정확한 경위가 이미 관계 기관에 의해 발표됐거니와 왜곡되거나 무분별한 흠이 없지 않은 세론이 비생산적이고 인심을 쓸모없이 자극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썼다.


급기야 당시 삼성이 거느리고 있던 동양텔레비전·라디오 등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에 나섰다. 텔레비전의 경우 9월18일 오전 9시30분 교양프로그램 <일요응접실>에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석초씨, 서울대 김기두 교수 등을 출연시켜 비호 방송을 내보냈고, 같은날 저녁 7시 <석양 속의 데이트>에서도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승한씨 등이 나와 삼성을 옹호했다. 동양라디오도 17, 18, 19일에 아침 저녁으로 삼성을 감싸고 돌았다.


이런 보도는 `대재벌이 밀수를 했다-특혜밀수의 정치파장' `국민 분노케 한 파렴치'(동아 9월17일치) 등 다른 신문들 보도나 진상 규명 요구 등 들끓었던 여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중앙의 삼성 옹호는 계속된다.


`벌과금은 한비와 무관'(9월19일치 1면).
`양벌죄 적용 불가 재수사 필요없다/ 한국비료는 관계없고 부산세관 처분도 적법”(9월19일치 7면).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에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9월19일치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


“정계 한 소식통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에 대해 한 재벌을 치기 위해 벌이는 하나의 정치적 장난에 불과하다고 하나의 주석을 붙였다. 그는 그 이유로 한국의 대재벌이 불과 2천만원짜리 밀수를 할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며 앞으로 국회에서 조사단이 구성되면 그때 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파헤쳐 이런 장난을 치는 못된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고 일갈.”(9월19일치 2면)


중앙은 온 국민이 분노하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 규명을 제쳐놓았다. 되레 날마다 지면을 통해 삼성 직원 몇명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불과하고 그에 따른 처벌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수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삼성쪽 주장을 그대로 싣는 `사보' 구실을 했다.


삼성 감싸기 보도가 언론계와 독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자 박정희 대통령이 9월21일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는 편집권 침해 가능성 등 일부 한계가 있었지만 △경영과 편집의 분리 △신문과 방송의 겸업 금지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언론의 공익성 보장을 위한 법률안' 제출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이번 삼성 사건을 보고 재벌이 언론을 독점해 사물시하는 폐단을 막을 필요성이 있다. 재벌과 언론기관의 완전분리, 특정인에 의한 언론기관의 독점소유 배제를 위한 법적 조치를 연구하라.”


대통령까지 나서자 버티던 이병철 당시 한국비료 사장은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언론과 학원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다짐했다. 대검찰청은 9월24일 이병철 사장의 차남인 한국비료 이창희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6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마무리지었다.


이에 대해 신문들은 `국민 기만한 각본수사 이병철씨 무혐의는 모순당착'(동아 10월7일치 3면)이라 비판하고, 사카린 밀수는 빙산의 일각이고 건설자재란 명목으로 세탁기, 양변기, 전화기, 텔레비전도 밀수했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27년이 흐른 93년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초대 사장 전기인 <유민 홍진기 전기>에는 여전히 이렇게 적혀 있다.


“중앙일보는 창간 1년이 못돼 기존 신문 중 최대 발행부수를 지키고 있던 타지를 1만부 앞설 수 있었다. 이것은 경쟁사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경쟁회사들의 견제가 시작된 것은 창간 1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마침 `한비' 사건이 발생하자 경쟁사들은 중앙일보에 포화를 집중했다. 한비 사건은 건설 중이던 비료공장에서 원료로 들어온 사카린 일부가 유출된 사건이다. 이것은 초기에 발견되어 당국의 사법적 조치가 있었고 회사로서도 관계자들을 문책했다. 그런데 몇몇 신문들이 이 사건을 다시 들춰 정치문제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같은해 나온 한권의 책은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을 보여준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병철 삼성회장의 맏아들 맹희씨가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맹희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65년 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을 요즘으로 치면 2000억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냉장고·에어컨·전화기·스테인레스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특별취재반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21902088.html


[언론권력] 삼성 경쟁자엔 예리한 칼날

삼성을 비호하는 `재벌언론' <중앙일보>의 폐해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에만 그치지 않았다.




사카린 밀수사건이 있고 3년이 지난 1969년 4월3일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방송사건'이 터진다. `미풍' 조미료 제조회사인 삼성 계열의 제일제당과 `미원' 조미료 제조회사인 미원주식회사가 조미료의 원료인 아노신산 소다를 일본으로부터 불법적으로 몰래 들여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삼성 계열사인 <동양방송>은 4월4일 밤 10시 뉴스에서 조미료 밀수사건을 보도하며 미원이 조미료 밀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을 부풀리고 제일제당의 조미료 밀수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미원이 광고를 후원하던 프로그램에 더이상 광고를 내지 못하게 했으며, 중앙일보는 밀수사건에 대한 미원의 해명광고를 싣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결국 미원은 4월5일 <동아일보> 2면에 동양방송의 불공정 보도와 중앙의 해명광고 게재 거부에 함의하는 의견광고를 실었다.


현대그룹은 1980년 언론을 갖고 있지 않은 자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았다. 1980년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은 한판 싸움을 벌였다. 현대그룹은 3월15일 중앙일보를 뺀 중앙일간지에 5단 크기의 `해명서'를 실었다. `삼성이 소유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등 중앙매스컴이 대대적 집중보도를 통해 여론을 오도해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해외공사 수주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현대그룹은 “한국 언론의 내일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중공업의 내일을 위해서도 기업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 재벌 비호의 언론을 진정한 언론인의 언론으로 되돌려놓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고 호소했다.


결국 두 재벌 수뇌부의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 사건을 계기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그룹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신문을 소유하고자 하는 꿈을 키우게 됐고, 이 꿈은 노태우 정권 아래인 1991년 11월1일 <문화일보> 창간으로 이어졌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22117089.html


[언론권력] 중앙일보, '판매전쟁' 끝없는 도발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 때부터 5년간 삼성의 지원을 바탕으로 신문시장의 무한 판매경쟁을 주도한 데 이어, 72년부터 한번 더 판매경쟁에 불을 붙였다.




72년 한국신문협회 결의를 무시하고 서울~부산 신문수송을 단독으로 강행해 판매협의로부터 제명당했고, 74년에도 같은 일을 되풀이해 제명 조처를 받았다. 75년 4월7일 신문의 날에는 휴간을 위반해 동업자들의 원성을 샀다.


69년 조선일보사 사장인 방우영씨까지 중앙일보사 사장인 홍진기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재벌이 자금을 동원해 신문업계를 장악하려고 하니 장사가 본업인지 신문이 본업인지 모르겠다. 중앙이 일등을 하겠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독주할 때 나오는 부작용과 원만을 어떻게 감수할 것이며, 그것이 삼성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방우영, <조선일보와 45년>)
자본에 바탕한 이런 공격적인 판매경쟁은 중앙일보 자체 발표 기준으로 74년 3월 50만8천부이던 하루 평균 발행부수를 75년 9월22일 70만부, 78년 12월12일 100만부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신문협회는 75년 5월, 77년 7월, 79년 9월 등 세차례에 걸쳐 △확장지무가지 규제 △월정 구독료 엄수 △판촉 경품 사용 금지 등의 신문판매 정상화 결의를 했으나 그리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중앙이 주도한 신문간 판매 경쟁은 76년 5월 이후 같은 석간신문으로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던 <동아일보>와의 전면 대립으로 발전했다. 동아는 같은해 5월10일 `입장료 비싼 용인 패밀리랜드, 빈약한 시설에 과대선전만'이란 제목으로 사회면 머릿기사를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4일에 걸쳐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같은달 17일부터는 `용인자연농원의 내막'이란 시리즈를 내보냈고, 6월28일부터는 삼성그룹의 땅투기를 비판하는 `땅의 애사'란 시리즈를 연재했다.


동아의 중앙 비판은 그뒤에도 계속된다. 동아가 78년 4월12일엔 `삼성조선 관련 혐의, 설계도 절취사건'을 보도하자, 중앙은 지면을 통해 정면으로 반격하고 나섰다. 동아가 이 사건을 캐고 들어가자 삼성은 중앙에 원색적인 광고로 맞대응했다.


“이제 악의와 중상과 허구의 보도로써 진실을 고의로 외면하고 국민의 이목을 현혹해 온 동아일보의 반사회적 누습이 또 다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 동아일보는 계속 실추되고 있는 사세를 만회해 보겠다는 저의에서 앞으로도 더욱 반사회적, 반의도적인 비열한 수법으로 우리를 헐뜯는 데 발벗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중앙 4월15일치) 동아는 또 80년 3월18일 용인자연농원의 양돈장에서 돼지 3만여마리의 분뇨가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에 버려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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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조선·동아 사주 친일행적

[언론권력] 일장기 '조선일보' 신문제호위 올려

일제 침략전쟁 동참 독려…군수물자 헌납…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쓴 친일 논설·기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두 신문의 사주인 계초 방응모와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적은 신문지상의 친일 행위 못지않게 뚜렷하고 확고했다.

지난 1985년 조선·동아의 `민족지―친일지' 논쟁에서 일부 밝혀졌듯이 두 신문은 일제의 `문화통치' 일환으로 창간됐다. 1920년 3월 5일 먼저 창간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친일 상공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진태·예종석·민영기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 한달 늦은 4월1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편집국장 출신 이상협을 발행인으로, 이른바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박영효를 사장으로, 그리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20대의 지식인 김성수(1891~1955)를 주주대표로 하여 창간됐다.

이와 관련해, 1919년 민간지 창간 허가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의 회고는 음미할 만하다.

“조선어 신문을 허용함으로써 조선 총독부의 젊은 관리와 젊은 조선인들이 흉금을 터놓고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이는 분명 조선인의 사상을 완화하는 데 유효했다고 확신한다.”

총독부의 민간지 허가가 언론자유 창달이라든지 조선인들의 언로개방 등과는 거리가 먼, 조선인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이들의 의식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유연한 통치 도구 차원이었음을 드러내주는 증언이다.

조선일보는 창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영난을 겪으며 몇차례 경영권이 옮겨간 뒤 1933년 신흥 금광 부호였던 방응모(1883~1950)에게 넘어갔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까지 조선일보는 친일파와 반일파가 경영권을 주고받는 과정을 겪었다. 친일파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조진태를 사장으로 한 초대 경영진은 5개월 뒤 `반일파'인 권병하-윤문하 체제로 잠시 바뀌었으나 총독부의 잇단 정간조처 끝에 1921년 매국노 송병준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송병준은 이후 3년 동안 조선일보를 이끌었다.

조선일보는 1924년 다시 신석우에게 인수되는데, 이때부터 이상재―신석우―안재홍-조만식으로 이어지는 민족진영 계보가 사장을 다시 역임한다. 조선일보가 내세우는 반일 논조의 기사와 사설은 대부분 이때와 권-윤 체제기에 쓰여진 것들이다. 또 당시 반일 기사를 쓴 기자의 상당수는 박헌영 등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반일 계보는 1933년 방응모가 신문사를 인수한 뒤 맥이 끊긴다. 그것은 창간 이후 4차례 당했던 정간 조처가 방응모 인수 후 폐간될 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데서 우선 확인된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 민족지로서 면모를 어느 정도 드러냈지만, 몇 차례 정간조처를 받으며 서서히 기개가 꺾인다. 창간 초기에 주식공모에 적극적 역할을 했던 김성수는 1924년 동아일보의 실질적 소유자가 된다. 총독부는 이 무렵 김성수의 친동생 김연수가 경영하던 경성방직에 `사업보조비'란 명목으로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 결과, 경성방직은 기업으로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공격적 경영전략으로 동아일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먼저 33년 4월 26일 방응모는 당시 5만부 남짓한 평균발행부수의 20배에 이르는 조선일보 혁신기념호 100만부를 찍어 전국에 무료로 뿌리고, 당시 동아일보 편집진 이광수와 서춘을 편집국장과 주필로 스카웃했다.

두 신문의 경쟁은 `일본인 광고주 기생관광'으로까지 이어졌다. 1934년 동아일보가 일본의 제약·제과·화장품 회사 간부 20여명을 초청해 기생관광을 시켜주자 조선일보도 이 수법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광고주 쟁탈전이 이처럼 이전투구 양상으로 번지자 문인 김동인은 “민간지들이 이윤추구를 위해 `매족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두 신문과 사주의 경쟁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친일행위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방응모는 1934년 <삼천리> 4월호와 한 인터뷰(`신문사 사장의 하루―방응모씨')에서 “천도군 사랑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고 밝혀, 일제에 군수물자를 헌납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경쟁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하면서 농도를 더한다.

1938년 6월 22일 김성수와 방응모는 총독부가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김활란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국정신의 현양 △징병·학병 독려 △전시 경제 정책에 대한 협력 등 실천 요강을 적극 홍보했다. 그해 9월 방응모는 총독부가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 백관수와 함께 참가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 조선인의 동참을 호소했다.

또 39년 5월 친일언론인단체인 조선춘추회 주최로 열린 `배영(排英)국민대회'에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고, 방응모는 “황군 만세”를 선창했다. 40년 10월 17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해체되고 국민총력 조선연맹이라는 더 강력한 친일 대국민 선전기구가 결성되자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와 함께 이 단체의 참사 겸 이사로, 방응모도 참사로 참여해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내몰고, 후방의 조선인은 위문품을 모아 보내도록 하는 선전활동에 나선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침략행위가 광기로 바뀌는 1941년에는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됐다. 이때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으로 참여해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김동환·이광수·모윤숙·윤치호 등과 함께 `채권가두 유격대'의 일원으로 나서 조선백성에게 일제의 전쟁채권을 사도록 독려했다. 또 이 무렵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등이 1천만원을 들여 설립한, 전쟁조력회사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선출됐다. 41년 10월에 친일단체 총결집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김성수는 이 단체의 감사로, 방응모는 이사로 참여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전장으로 내모는 데 첨병노릇을 한 단체다.

1940년 일제가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자 방응모는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을 본격적인 친일잡지로 개편했다. 나아가 스스로 친일논설을 쓰기도 했다. 1940년 조광 3월호 권두언에서 그는 “안으로는 신체제 확립과 밖으로는 혁신외교정책을 강행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일단의 노력을 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조광을 일제의 `대동아 정책'을 널리 알리는 도구로 쓸 것임을 분명히한 것이다. 이어 그가 조광 1942년 2월호에 쓴 논설 `타도 동양의 원구자(원수)'의 내용은 이렇다.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미국)에게서 동아(東亞)를 이탈시켜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
미국을 원수로, 일본은 평화의 사도로,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논설에서 그는 전쟁 승리를 위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국민 개로(皆勞)운동, 물자절약,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글에서 내린 결론은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때에 물력과 심혈을 총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조광은 조선어 잡지였는데도 42년에 이르면 아예 일어로 쓴 기사를 싣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창간기념 특집으로 `조선일보 사장열전'을 연재하면서 `계초 방응모'편에서 “폐간 후 계초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가 친일잡지를 발행하고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성전문학교 설립자로서 지식인이었던 김성수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매일신보의 연속물(`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 `대의에 죽을 때―황민됨의 책무 크다'를 기고하는 등 여러 편의 극렬한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다음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편에 쓴 글의 일부다.

“평소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전을 앞둔 오늘날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의무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늘 말하여 왔거니와 지금이야말로 제군은 이 말을 현실에서 몸으로써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 성전에 치참치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써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앞서 43년 8월 5일치 매일신보에 쓴 `문약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라는 논설에서도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시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을 양(養)하여 황도를 선명(宣明)하자”고 선동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변방을 돌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이들은 말과 글을 동원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조선의 물자를 일제에 바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조선일보가 지난 85년 동아일보와 벌인 `친일 논쟁'에서 “두 신문의 친일시비로 얻어지는 것은 서로의 상처뿐이며, 잃는 것은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일 따름”이라고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인촌기념회가 발간한 <인촌 김성수>는 당시 인촌이 쓴 글들은 모두 <매일신보>가 조작해 썼다고 주장했다. 1991년 동아일보사가 펴낸 <평전 인촌 김성수>는 인촌을 “일제 강점의 암흑기에 수난극복의 횃불을 밝혀 근대화의 민족적 과제를 착실히 이룩하는 데 거인의 발자취를 남겼고, 특히 민족교육·민족언론·민족산업의 3대과제의 발전에 힘씀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건설의 기틀을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또 1980년 간행된 방응모의 전기 <계초 방응모>의 서문 첫 줄은 “암흑기의 민족에게 언론의 횃불을 밝혀 민족의 길을 비추었던 선구자”로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과 이들의 주장 사이의 괴리는 이렇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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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나치부역 언론인엔 '관용'이 없었다

프랑스는 관용(톨레랑스)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군대에 체포된 나치 부역자들(콜라보). 주간 <파리마치>는 이들이 모두 처형됐다고 전했다.

그 관용의 역사는 유서가 깊은 것이어서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말할 자유를 탄압한다면 당신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라는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선언에서 벌써 투철한 정치적·이념적 관용 정신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도 2차대전 때의 나치부역자에게만은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나치 점령기 동안 독일에 협력한 사람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이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혹독하게 죄를 물었다. 그런 점에서 해방 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들의 공격을 받아 해산되고 응징의 기회를 상실한 우리의 사정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1940년 히틀러 군대에 점령당한 지 4년 만인 44년 8월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즉각 `정의의 법정'을 세우고 나치 부역자 단죄에 나섰다. “나라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반역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 장군의 신념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부역자 색출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99만여명의 나치협력자가 투옥되고 이 중 6700여명에게 사형, 2700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 1만여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만2800여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또 9만5천여명에게는 부영죄형을 선고하고 7만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렇게 단죄받은 나치부역자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엄중하게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지식인, 특히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법정은 언론인 중에서도 애초부터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파시스트보다 독일의 지배가 확립되자 뒤늦게 나치 선전원으로 돌아선 `매춘 언론인'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드골이 밝힌 `최우선 가중처벌'의 이유였다.

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는 “프랑스를 지켜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한 기사와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기사를 쓴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세르는 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반민족 언론인들의 사상적 지도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다. 독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르 마탱>의 편집국장 스테판 로잔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 밖에 독일방송의 선전문을 작성했던 폴 페드로네, 독일 점령 기간중 <라디오 파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장 헤롤드-파퀴, 36살의 작가 겸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 등이 민족반역자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와 함께 나치 찬양에 적극적·소극적으로 나섰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독일 점령 기간중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해 폐간시키고 언론사 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900여개의 신문·잡지 가운데 649곳이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나라에 빼앗겼다. 일간지 가운데 처벌을 면한 것은 <르 피가로> 등 3곳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치점령기 동안 자진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었다.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단죄와 관련해 <프랑스의 대숙청>을 쓴 언론인 주섭일씨는 “드골의 언론계 대숙청으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언론은 각계 각층 국민의 의사를 공정하게 대변하는 공공성을 확보하게 됐고, <르 몽드> 같은 세계가 존경하는 신문도 언론개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프랑스의 언론인 숙청은 단순히 반민족세력의 처단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부도덕한 인간들이 언론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와는 반대로,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이니 “일본군 입대는 조선인의 의무”니 거리낌없이 떠들었던 우리의 친일신문들은 아무런 처벌도 응징도 받지 않고, `민족지'로 둔갑해 수십년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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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동아일보의 친일 곡필

[언론권력] 동아,친일 언론보국 서약

2부2. 동아일보의 친일곡필 
“조선통치 익찬 다하려 ‥”사고게재 
독립투쟁단 인명살상 폭도로 묘사
“지원병제는 반도통치 신기원”
“옥체 강건하옵시고 황실 무궁하옵기를”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총알받이 미화



[사진설명] (맨위) <동아일보>는 38년부터 40년 폐간되던 해까지 해마다 1월 1일치 1면 머리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찬양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사진은 일왕을 `대원수 폐하'라고 부르며 정무·군무에 부지런히 힘쓰신다고 찬양한 40년 1월 1일치 1면. (좌)37년 6월 2일 장기 정간 뒤 처음 나온 속간호 1면 하단에 실린 '사고'.“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글귀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아래)동아일보는 일제의 '지원병'으로 끌려가 비명에 간 젊은이 이인석의 죽음을 “지원병 최초의 꽃”“조선인 지원병의 영예”라고 선전햇다.(39년 7월 8일치)또 이튿날에는 고향집을 찿아가 죽은 이의 처까지 끌어들여 침략전쟁의 선전도구로 만들었다.(7월 9일치)



1936년 8월. 식민지 조선 민중의 가슴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당시 `마의 벽'이라던 2시간 30분 벽을 돌파하며 1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희소식은 동시에 비보이기도 했다.


조선의 아들 손기정이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기 때문이다. 이해 8월 25일 <동아일보> 체육부의 이길용 기자는 월계관을 쓴 손 선수의 금메달 수상 사진에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 이를 신문에 내보냈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총독부의 분노를 촉발시킨 이 사건으로, 이길용 기자 등 8명이 구속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279일이라는 최장기 정간 끝에 다음해에야 속간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1976년 나온 <동아일보사사>는 이렇게 전한다.


“이런 민족의 아픔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의 대변지를 자임해 온 본 동아일보가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누구의 지시도 아니, 명령도 아닌 거의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접한 경영진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사실을 알고난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인촌 김성수전>, 동아일보사, 1976)


동아일보는 이길용 기자와 관련자들을 쫓아낸 뒤 다음해 6월 2일 속간과 함께 낸 `사고'에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 하고 스스로 `일본 언론'임을 서약했다.


이 사건의 또다른 진실은 `일장기 말소'가 동아일보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장기 말소 사진은 동아일보보다 12일 앞서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에서 먼저 내보냈다. 동아일보가 다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내보내면서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에 대해서도 무기한 정간 처분을 내렸고, 조선중앙일보는 이 일로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친일적 행태는 1932년까지 올라간다. 이 해에 터진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동아일보는 “대불경(大不敬) 사건 돌발/어로부에 폭탄투척/폐하께옵서는 무사 어환행/범인은 경성생 이봉창” 이라는 제하에 <조선일보> 및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사와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냈다. 이봉창 의사를 `범인'이라 부르고, 폭탄 투척이 `크게 불경스러운 일'이며 `천황 폐하'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내용에서 `민족지'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또 이 시기 국경지방의 항일무장독립투쟁단을 동아일보는 인명을 마구 살상하고 돈을 뜯는 폭도로 묘사하였다. `최근 중대 사건 빈발/인명살상 납거, 자금 징수 등'이라는 제하의 34년 8월 25일치 기사는 이렇게 돼 있다.


“반만항일군과 조선○○군의 활동은 이즈음 지극히 맹렬하여… 압강구를 습격하여 전 초산경찰서 순사 김용흥의 방에 침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의 부부에게 중상을 입히고 김의 장남과 장녀를 죽였음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이외의 것을 소개하면 인질납거, 군자금 강징, 반동분자 기타 총살 등 무시무시한 사실이 많다.”



일장기 말소 사건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뒤 동아일보의 친일논조는 한층 색채가 짙어졌다. 이해 7월 19일 조선일보가 일본군을 아군·황군으로 표기하 시작한 것과 때를 맞추어 동아일보도 아방·아군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이래 지면에서 `일본=우리나라'는 의문의 여지 없는 등식이 된다.


“…이때에 있어 황군의 노(勞)도 노려니와 총후(후방)의 성의도 여기에 자세히 매거할 것 없이 열렬하였다. …전 조선적으로 팽배하는 애국의 지정(至情)을 축복하는 동시에 다시금 시국 재인식의 기화를 삼아 다시금 일층 격앙발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37년 9월 7일치 사설 `애국일')


일제가 명절로 꼽았던 명치절에 대해서도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양 보도했다.



“명치 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3일의 명치절! 이날의 아침부터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37년 11월 4일치 2면 머릿기사)


1938년에 들면 일제의 징병·징용·공출 등의 인적·물적 수탈이 본격화하고 동아일보의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도 더 한층 선명해진다. 4월에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한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조선의 혼을 빼앗는 `교육령'을 개정·공포한다. 이 제도에 반대해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투쟁을 벌이다 40여명이 투옥됐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 제도의 실시를 축하'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조선 민중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제 일보다. … 이러한 정세에 있어서 미나미 총독의 영단은 역대 총독이 상상도 하지 않던 병역의 의무를 조선민중에게 부담시키는 제일보를 답출(踏出)케 한 것이다. 이에 조선 민중도 이 제도가 실시되는 제1일부터 당국의 지도에 순응하여서 그에 협륙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또한 교육령 개정은 미나미 총독의 5대 정강중의 국체명징, 학제쇄신의 구체화로서 조선 교육사상 획기적인 것이다.”(38년 4월 3일치)


또 바로 다음날 날 기사를 통해서도 “전승의 영광에 빛나는 양춘, 찬연히 빛나는 반도 통치사의 한 페이지― 제국의 숭고한 사명 수행에 바친 2천3백만 민중, 애국의 지성이 결실하여 이에 조선일 지원병 제도와 신조선 교육령이 형영상반(形影相伴)하여 실시되어 반도통치에 하나의 신기원을 획한 환희의 날” 이라고 찬양했다.


또 `지나사변'(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7월 7일 사회면 머릿기사는 “조선은 병참기지로서의 중대한 존재로 총후 국민의 열렬한 단결, 호국의 운동은 다른 각 지역에 앞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고 전하고 사설도 “사변 1주년을 당함에 있어서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감격적으로 쓰고 있다.





  • 1939년 7월 7일치 1면 사설 '지나사변' 전문
    앞서 친일매국 단체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자 동아일보는 7월 2일 치 사설을 통해 “중국 장 정권을 지원하는 영·불·소의 반일적 행동과 태도라는 난관을 물리치고 극동의 영구평화를 확립하려는 위업을 달성하려 할진대 장기에 긍한 국가총력전의 이행이 필요하다” 고 역설하면서 “민중은 모름지기 `연맹'의 지도에 순응하여 모두가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듯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친일매국을 선동했다.

    또 이 해 총독부가 실시한 조선인 지원병 모집으로 6월15일 육군지원병 훈련소가 문을 열자 동아일보는 이를 “영예”라며 흥분되어 보도한다. 나아가 다음해 지원병 최초로 전사자가 나자 다시 “조선 지원병의 영예”라고 하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제국주의의 총알받이가 되도록 권유한다.

    “조선인 지원병 최초의 명예의 전사자 이인석 군은 총독부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제1기 전기 졸업생으로 재소 중에도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작년 여름 입대 후에는 총후 조선의 여망에 맞추어 군문에 정예하다가 지난번 제일 충정을 보게 되자 굳은 결의를 보이고 용약 출정하였던 것이다.”(39년 7월 8일치)



    이어 이튿날에는 일제 침략의 총알받이로 죽어간 희생자의 집안을 찾아가 `영예의 전사한 이인석 가정방문기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 부군 못지 않은 부인의 결의'라는 제하에 “생활은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지원병을 지원하였던 터인데 이군의 부인은 `전선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은 남자의 당연한 일이오니 슬픈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부군에 못지 않은 굳은 뜻을 보이었다” 고, 전사자의 부인까지 일제찬양의 입으로 끌어들였다.

    39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동아일보는 `봉축 천장가절'이라는 사설을 내보낸다.

    “천황 폐하께옵서 38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는 날이니 …더욱이 옥체 어강건하옵시고 황초 또한 견강하여감을 배문(拜聞)함은 국민의 영광으로서 앞으로 더욱 황실의 어번영과 보산의 무궁하옵기를 봉축하는 바이다 …과반 제국의회 개원식에 당하여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여 동아 영원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로 국민정신의 앙양과 국가총력의 발휘에 의치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하옵셨다. 이 어분부를 봉배하여 국민은 정신을 총휘하고 국가의 총력을 겸발하여 일의매진, 사변목적 달성을 필기하여야 할 것이다.”



    또 40년 일왕 히로히토 생일에는 “1억 민초는 항상 황은의 광대심후함에 감격을 새롭게 하고 봉응경앙의 염을 굳게 하거니와 국민은 산업달성 시간 근복에 경일층의 결심과 각오를 함으로써 빨리 성업을 완성시켜 예려를 봉안하고 성지에 봉부하는 것이 1억 국민의 총중이 아니면 안 된다”


    고 거듭 맹세한다. 일제에 저항다운 저항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한 채 너무도 무력하게 굴종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극렬한 친일논조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40년 8월 10일 폐간된다. 일제가 조선어말살정책과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사는 사사에서 “이즈음 동아·조선 양대지의 논조와 색채는 이미 매일신보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퇴색해 있었다”(<민족과 더불어 80년>)고 자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쨌든 동아일보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사주 김성수는 매일신보에 학병 출전을 독려하는 논설을 쓰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839863.html


    [언론권력] 일제하 조선·동아의 친일광고 백태

    “축 징병령”“황군 무운 기원”
    조선.동아 광고도 친일 앞장
    어린이까지 선전 이용


    ‘기(祈)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1937.10.13) ‘축(祝) 남경함락(南京陷落)’(1937.12.22) ‘봉축(奉祝) 명치절(明治節)’(1939.11.3) ‘축(祝) 지나신정권성립(支那新政權成立)’(1940.4.18)
    얼핏보면 신문기사의 큰 제목 같지만 사실은 일제 당시 한 국내신문에 실린 광고 선전문귀들이다.기사보다도 훨씬 노골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당시의 자사신문을 두고 ‘민족지’라고 강변해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에는 친일기사 이외에도 지면 하단부 광고란에는 이같은 친일광고가 수도 없이 많이 실렸다.두 신문 가운데 대량의 친일광고를 게재한 신문은 조선일보쪽이다.조선일보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 이후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하는 광고를 잇따라 게재했다.(사진 위) 기사에서 일본군을 아군(我軍),황군(皇軍)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그 아래 광고란에서는 이들에게 위문품을 보내자거나,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는 문귀를 담은 상품광고를 버젓이 게재했다.특히 이 신문들은 일부 친일기업인들이 전쟁특수를 노려 ‘후방의 위문대(袋) 지원은 전선과 후방을 잇는 가교’라고 선전해대자 이에 발맞춰 현란한 군국주의 문귀와 함께 전선의 군인을 등장시켜 전쟁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일제하 조선일보에 게재된 친일성향의 광고는 총340여건으로 나타났다.시기별로는 만주사변 이후(1932.3∼1933.5) 14건,중일전쟁 이후 폐간때까지(1937.7∼1940.8) 326건 등이다.또 조선일보의 자매월간지인 ‘조광(朝光)’에 게재된 친일광고 건수는 70건 정도로 집계됐다.이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보다는 적은 양이지만 경쟁지였던 동아일보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다.


    조선일보는 만주사변 발발후인 1932년 3∼4월경에는 ‘부상전사를 위로합시다’정도의 친일광고를 실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문귀를 담은 광고를 실었다.몇가지 예를 들어보면,중일전쟁 발발 2개월후인 37년 9월 7일자에는 총후(銃後),즉 후방의 주민들을 상대로 ‘총후의 책무,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귀가 담긴 상품광고를 실었으며,조선일보 6,000호 기념호인 이듬해 3월 1일자에는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문귀가 담긴 인단(仁丹)광고를 실었다.또 이해 5월 5일자에는 ‘군민일여(軍民一如) 거국적 국가보국(報國)’이라는 선전문귀의 아지노모도의 광고를 실었으며,6월 8일자에는 ‘장기전(長期戰)에 준비하자’는 모리나가건빵의 광고를,11월 16일자에는 ‘중지(中支)에도 남지(南支)에도 황군(皇軍)의 기(旗)빨이 휘날리게’라며 멘소레담 광고를 실었다.특히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37년 9월 7일자에는 어린이들이 일장기와 총,일본도(刀)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는 그림과 함께 ‘총후의 책무 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귀가 적힌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이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선전매체로 동원하여 침략전쟁을 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아래) 이같은 광고는 어린이들에게 단순히 전선에 위문대를 보내자는 정도가 아니라 어린이는 ‘내일의 일본군’(1937.10.28),‘작은 용사’(1937.11.14)라고 지칭하면서 ‘애기들이 자라나면 일본이 성장한다’(동아일보,1939.11.18)고 강변하는가 하면,태평양전쟁 무렵에는 ‘건아 만세! 뻗어나는 일본의 저력’(매일신보,1943.4.15)이라며 어린이들을 ‘미래의 전사(戰士)’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역시 상당수의 친일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1941년 1월호에는 ‘축(祝)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신춘(新春)’이라는 문귀의 인단광고를 실었으며,이듬해 2월호에서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일억일심(一億一心) 총동원’광고를 실었다.태평양전쟁 발발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6,7월호에서는 ‘축(祝) 징병령시행’문귀의 광고를 실어 은연중에 징병제를 선전하였으며,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전쟁에서 최후까지 이겨내기 위하여’(1944.6월호)‘싸우는 여성은 강하다’(1944.5월호) 등의 자극적인 문귀를 담은 광고물 게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운현(친일문제연구가)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928762.html


    [언론권력] 1939년 7월 7일치 1면 사설 '지나사변' 전문

    <동아일보>가 중일전쟁 2주년을 맞아 1939년(소화 14년) 7월7일치 1면 머리로 내보낸 사설 `지나사변 2주년'(사진). 중국침략을 중국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왜곡하고 전 조선인의 일제 충성을 선동하는 사설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7일은 지나사변 발발 제2주년 기념일이다. 시간(時艱) 극복에 매진하는 총후 국민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전몰장병의 영령에 경건한 묵도를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좀더 큰 시간에 대처할 결의와 준비를 갖출 날이다. 그리고 이날은 우리 국민에 한하지 않고 아시아의 민족이 총기하여 기념할 날이며 후일 역사상에 특기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돌아보면 재작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에서 발단한 지나사변이 오늘과 같이 진전되었으니 이것은 결코 우연적인 사실이 아니었고 지나(중국)측의 무모한 항일용공(抗日容共)의 도전적 태도에 대한 부득이한 거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륙의 민중으로 하여금 질곡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하여 먼저 장개석 정권을 타도하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음으로 양으로 장정권을 원조하는 제3국의 온갖 마수를 청소하여 동양에 구원한 평화를 가져오고서 마침내 신무의 예검을 들게 되었으니 지금 대지에는 방공친일(防共親日)의 대기가 나부끼고 거룩한 흥아의 신사명이 전 아시아 문중의 축복을 받으면서 가장 씩씩하게 수행되어 가는 중이다. 그동안 충용한 황군은 그 모든 신고를 참아가면서 삭북의 위준한 산악에서 혹은 강남의 망향한 야원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군을 공격하여 파죽의 세로써 연전연승의 전과를 거두어 만리장성의 벽상에 혹은 대황하의 연안에 혹은 자금산두에 혹은 저 멀리 해남도중에까지 광휘 있는 일장기가 번창하게 되었고 그 작전의 규모가 크고 또는 전투의 성과가 큰 것은 인류의 전쟁사상에 실로 공전의 기록이었다. 이것은 오직 황공하옵신 폐하에 보국진충을 다한 출전장병의 무훈이 혁혁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총친화의 대도에 내선일체의 구현으로써 사변목적 달성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9160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