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계철학사>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아테네 학당’.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온갖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1950년 출간뒤 17차례 개정…칸트 중심 서술
인도·중국 철학부터 20세기 현대철학까지

〈세계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박민수 옮김/이룸·3만9900원
독일 학자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수많은 철학사 책들 가운데 돋보이는 자리에 놓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읽지만 아무도 언급해서는 안 될 책’으로 통한다고 한다. 철학사를 명료하고도 일관성 있게 알려주기 때문에 읽으면 큰 도움을 받지만, 한편 일반인을 독자로 삼아 쓴 교양서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모른 체해야 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1915년에 태어난 지은이는 철학과 법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 연구자이면서 오랫동안 출판 편집인·번역가·사전 편찬자로 활동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이 대중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품은 철학사 책을 쓰게 한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50년 처음 출간된 뒤 1999년까지 모두 17번이나 판을 갈았다. 그때마다 내용을 보충하고 확장했으며, 그 결과로 20세기 현대 철학 전반을 마저 아우르게 됐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마지막으로 나온 1999년 판이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인도·중국 철학을 주목한 데 있다. 지은이는 책의 제1부를 ‘동양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중국 철학의 성립과 전개에 할애한다. ‘동양철학’에 대한 이런 관심은 초판이 나온 시점에서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공정성은 개별 철학자들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은이가 서술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중심이 그가 ‘서양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하는 이마누엘 칸트(1724~1800)다. 칸트 철학을 설명하는 데 한 장(챕터)을 할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철학사 서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칸트는 나침반 노릇을 한다. 말년의 칸트는 자신의 연구가 세 가지 물음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는데, 그 세 가지 물음이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행위), ‘우리는 무엇을 믿어도 좋은가?’(믿음) 흥미로운 것은 “철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이 물음들은 칸트가 나열한 것과는 정반대의 순서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종교적 믿음이 출현했고 이어 인간 행위를 문제삼는 윤리학적 물음이 나타났으며, 세계 자체에 관한 앎의 문제가 마지막에 솟아났다는 것이다. 이 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변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철학사 서술의 기본 방향이 된다.
명확성과 체계성이라는 이 책의 장점은 인도 철학사를 설명하는 부분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인도는 철학적 인간 정신의 탄생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인간 문화 발상지 중 하나다.” 아리아족의 정복과 함께 성립한 브라만교는 철학적 사고의 첫 씨앗을 품고서 전개됐다. 고대 인도 철학의 모든 물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라는 개념으로 응축됐다. 브라만이란 애초 지배자인 승려 계급의 기도·주문을 뜻하다가 이어 ‘신성한 지식’이란 뜻으로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창조의 원리’로 승격됐다. “자신 안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탄생시키고 또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쉬고 있는 거대한 세계정신”이 브라만이었다. 브라만이라는 관념에 이어 아트만이라는 관념이 생성됐다. 본디 입김·호흡을 뜻했던 아트만은 ‘우리 자아의 가장 깊은 핵심’이란 뜻으로 진화했다.
〈세계철학사〉
인도 철학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이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데 있다. 이 놀라운 인식의 도약은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 강화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대항해 유물론이 나타나 오직 감각적 세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설파했다. 브라만교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 것은 기원전 6세기에 출현한 불교였다. 불교는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영원한 실체를 모두 부정하고, 무상한 감각적 세계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전 시대의 유물론처럼 이 감각적 세계를 즐기라고 하지 않고, 이 세계에 대한 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 벗어남이 바로 ‘타던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하는 ‘니르바나’(열반)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불교의 도전에 맞서 브라만교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목숨을 걸다시피 한 이 사상 투쟁은 유례없이 풍요로운 사유의 마당을 열었다. “여러 정신사조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이 시대의 인도만큼, 철학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퍼진 경우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찾기 어려울 것이다.” 도처에 철학 학당이 들어섰고, 철학 논쟁이 가는 곳마다 벌어졌다. 논쟁은 흡사 로마 시대 검투사들의 싸움판 같았고,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인도 철학의 이런 장관은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소피스트들의 활보와 함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라는 3대 천재의 시대가 열렸다. 특기할 것은 페리클레스가 이끌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가 저물고 난 뒤에 철학이 만개했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확인한다.

고명섭 기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정석구 칼럼] ‘독재자의 딸’ 무대에 오르다


필자는 박근혜 의원을 주저 없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른다. 사실 ‘독재자의 딸’만큼 역사성이 오롯이 담겨 있고, 박 의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호칭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꼭 박 의원을 비난할 목적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그의 정치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정치적 부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가 만약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추론하는 분석틀로서 ‘독재자의 딸’이란 호칭만큼 적절한 용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딸’이란 용어는 박근혜의 정치세계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웅변한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12월11일, 그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60~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바라보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처음부터 아버지 박정희를 거론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는 발언에선 이번 대선의 복지공약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것임을 엿보게 한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영광스런 업적’을 재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함을 알 수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평가에선 이런 인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7월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아버지로서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1989년 5월19일, 10·26 박정희 시해사건 뒤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말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문화방송> ‘박경재의 시사토론’) 특히 5·16 당시의 피폐해진 생활상과 불안한 안보상황을 거론하며 5·16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논리 구조는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역사인식이 아버지 박정희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영락없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딸’인 그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이는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반독재 슬로건’이 적어도 현실정치에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박근혜 지지자들이 돌아설 리 없고, 구경꾼들도 지금 시대에 무슨 연좌제냐며 시큰둥할 것이다. ‘박정희 향수’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켰을 수도 있고, 먼 과거인 박정희 독재보다 현재의 박 의원의 정치적 비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선거전략상으로만 보면 민주진영의 ‘독재자의 딸’ 딱지붙이기는 박근혜를 깎아내려 선거에서 표를 더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효력을 상실했다.

만약 ‘독재자의 딸’인 박 의원이 대세론을 유지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 사회는 ‘박정희 독재 18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이는 또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수구·냉전적인 원조 보수기득권층이 변신에 성공해 화려하게 부활함을 의미한다. 설사 박근혜의 당선이 ‘독재자의 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비전 때문이라 해도 이런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지지자들은 유신 독재에 대한 세탁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의원은 어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됨으로써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권에 가장 근접한 집권여당 대선 후보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 사후 범보수정권의 맥을 이었던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등과는 달리 ‘박정희 영웅신화’에 젖어 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퇴행이 불가피할 것이다. 12월19일 국민의 선택이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출처

HBO - 미국의 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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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조성택 지음/돌베개·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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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초기 대승불교 연구로 학위를 받고 뉴욕주립대에서 2002년까지 6년여 동안 비교종교학을 가르친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불교와 불교학>에 따르면, 미국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문화’ 또는 ‘철학’에 가깝다. 그들은 붓다(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일 뿐 붓다나 승단과 같은 종교적 장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승려가 없는 재가 중심 불교단체가 많고 참선만 하는 ‘선 센터’가 많다. ‘신심’에는 관심 없는 ‘과학적·이성적 불교도’들, 자칭 ‘불교적 기독교도’ ‘불교적 천주교인’이 수두룩하단다. 그들에게 기독교 ‘교회’는 결혼식장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주일예배는 거의 노인 차지고, 식사 전에 기도를 올리는 가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불자들은 계속 는다. 한국 사회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 같다.
신앙 없는 불자들이 다수인 미국 불교가 아직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볼 순 없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조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인도 불교가 이질적인 중국문명에 수용되고 동화되는 데 약 500년이 걸렸다. 그가 보기에 최근 100년은 대중매체 발달과 사회적 역동성 등을 고려하면 고대 500년보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말하자면 미국 불교는 미국 풍토에 맞게 독자적으로 진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도 불교의 중국 정착은 인류 문명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불교의 서방 정착 역시 문명사의 대사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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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교수는 문제는 한국 불교 주류인 조계종단이라 얘기한다. 일제 때부터 한국 불교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근대적 (사회)유용성’을 입증하고 일본 불교와는 다른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나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려고 앞서가던 일본의 근대불교 모델을 따라가면 정체성을 잃고, 정체성만 찾다간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근대적 유용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한국적 근대불교 모델을 창안해내는 길이 있었다. 그걸 위해 승려도 결혼하고 육식도 하자는 ‘대처육식’과 염불당 폐지, 근대적 승려교육 등을 부르짖으며 낡은 전통을 벗어던지자는 외침들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광복 뒤 정체성 문제는 결국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라는 이항대립적 문제로 단순화됐다. 대처 제도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처는 포교에, 비구는 수행에 전념하는 역할 분담을 통해 한국 근대불교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자는 다수파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친일청산, 왜색불교 추방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소수 비구승들은 다수파 대처승들을 종단에서 몰아내고 조계종을 세웠다. “근대불교를 항일과 친일의 도식적 관점으로… 한국 근대불교사 전체를 이른바 ‘항일 민족의식’과 ‘전통수호를 통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현재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의 성립을 한국 근대불교의 완성으로 보고자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역사 기술이며 …식민시기를 포함해 근대기 동안 한국 불교인들의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해방 이후 조계종이 등장하는 과정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고 은연중에 조계종단을 한국 불교의 유일한 정통교단으로 옹호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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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저지를 위한 연속 대담회





기아와 식량 낭비


























5초에 1명.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아니다. 기아로 숨지는 사람 수다. 2005년 유엔보고서는 전세계에서 5초에 1명씩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적었다. 7년이 흘렀다. 인류는 부자들의 곳간을 열어 굶주린 세계를 얼마나 먹였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메마른 이들은 더 배고파졌다. 세계의 비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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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기아는 남반구만의 수난이 아니었다. 유럽도 한때 기아로 배를 곯았다. 유대인을 말려 죽이려던 히틀러의 기아 계획과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평균수명과 평균체중을 갉아먹었다. 전후인 1945년에 창설된 유엔이 세계질서의 재건과 더불어 기아와의 투쟁을 목표로 이듬해 식량농업기구(FAO)를 발족시킨 이유다. “식량 생산 농업을 발전시키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식량을 배분”하기 위해 인권선언 제25조에 식량권, 즉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긴급 원조를 담당하는 세계식량계획(WFP)을 만들어 늘어만 가는 재앙에 신속하게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기아로 고통받는 당사자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 유엔의 목표는 2015년까지 기아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지만, 기아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수는 점점 증가한다. 농업생산력이 낮은 남반구 국가들의 기아는 항구적이다. 기아는 대물림되고 해충과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재앙은 가속화되고 있다. 기아가 ‘장기 지속’되는 데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자유무역과 시장의 원칙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수호자들과 기아의 새로운 원흉으로 부상한 바이오연료 및 식량투기꾼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현 시점에서 전세계의 농업은 120억 명 정도는 문제없이 먹일 수 있다. 120억 명이면 현재 지구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그러니 기아는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식량은 어디로 가는가? 독일의 프리랜서 기자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와 영화감독 발렌틴 투른은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죽는가>에서 환경·식량단체의 추산에 기대 전세계에서 생산한 식량의 3분의 1이 사라지거나 낭비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더욱이 들판이나 바다에서 우리의 식탁까지 이어지는 전반적인 식량사슬을 고려하면, 산업국가 식량 에너지의 손실은 50%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FAO는 2011년 5월 중순 전세계를 대상으로 실시한 식량 손실과 식품 낭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매년 총 13억t의 식량이 헛되이 버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총량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버려지는 음식만으로도 전세계의 굶주리는 사람 모두에게 두 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저자들의 말이 뼈아프다.

우리는 왜 음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상실했을까. 저자들은 식품이 점점 싸지고 다양해졌다는 점과 관련 있다고 강조한다. 식량이 흔하니 귀한 줄 모른다는 뜻이다. 대형마트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소비를 낳고, 이는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쓰레기 더미로 던져지는 식품도 아주 많다. 구매자에게 늘 동일하고 완벽해 보이는 제품을 선호하는 상인들은 양상추 잎 하나가 뭉개지면 양상추 한 통을 그냥 버리고, 복숭아 하나에 곰팡이가 피면 그 상자 전체를 내버리기도 한다. 상하지 않은 과일과 채소를 골라내는 일을 할 직원을 고용하면 오히려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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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그들만의 진실>






고등교육 과정의 최고 브랜드로 추앙받는 하버드의 위상은 ‘세계 모든 대학의 교황청’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절대적이다. 하버드의 교훈(校訓)은 ‘베리타스’(Veritas),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돈과 권력에 오염되지 않고 오롯이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한 학문의 전당이자, 인류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온 대학으로 알려진 하버드. 신은정 다큐멘터리 감독의 <하버드, 그들만의 진실>(시대의창 펴냄)은 진리보다는 돈과 권력을 좇느라 여념이 없었던 하버드의 이면과 실체를 파헤친 책이다. 책은 하버드가 미국을 넘어 세계를 어떻게 지배해왔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말한다. “하버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미국과 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1636년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계 신교도(WASP·와스프)들이 목사 양성을 위해 세운 하버드 역사의 첫 페이지는 마녀사냥으로 얼룩졌다. 19명을 처형한 1692년부터 1년 동안 마녀재판 재판관들은 당시 하버드의 총장과 그 졸업생들이었다. 19세기 중반 ‘노예해방론자들의 천국’이라고 자부하는 하버드 총장들은 노예를 거느리며 살았고, 20세기 초 하버드 학생들은 보스턴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에 나섰다. 백인 중심이던 하버드의 학자들은 미국 우생학을 발전시키고, 이것은 독일 나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4년 히틀러의 최측근이 된 하버드 동문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하버드 졸업식에 초대돼 칙사 대접을 받았다. 오랫동안 상류층, 백인, 남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던 하버드에서 흑인과 여학생은 차별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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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버드를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 총장을 포함한 13명(2010년까지 7명)으로 이루어진 제왕적 조직 ‘하버드 법인’이다. 총장은 이사들이 선출하고, 이사는 종신직이다. 회의 내용과 결과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J. P. 모건과 록펠러 가문이 주축인 법인 이사들은 거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업의 중역들이 대부분이다. 골드만삭스 회장, 빌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을 거쳐 시티그룹 회장을 지낸 로버트 루빈도 그중 하나다.

저자가 찍은 독립다큐멘터리 <베리타스: 하버드, 그들만의 진실>을 바탕으로 쓴 이 책 속, 하버드의 모습에서 서울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쁜 의미에서 서울대는 한국의 하버드였다. 조지 버나드 쇼가 “만약 하버드가 개교 300주년을 기념해 학교를 완전히 불태워버리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려 다시는 하버드대학이 생기지 못하게 한다면 그 기념식은 나에게 가장 강렬한 만족을 줄 것”이라고 냉소했지만, 명문 하버드를 향한 열망은 여전히 뜨겁다. 2010년 하버드에 입학한 한국 학생들은 300여 명으로, 캐나다와 중국에 이어 3위를 달린다. 세계 대학들의 대학인 하버드가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계급을 위한 ‘고등교육의 크렘린’으로 불리는 까닭을 우리가 알아야 할 이유다.




<중국인 이야기 1>





류사오치와 린뱌오 등 혁명 주역의 오욕의 인생에서 시작한 <중국인 이야기 1>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20세기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다. 2016년까지 4년에 걸쳐 총 10권 완간을 목표로 한 장정의 첫발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이 책은 ‘중국판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될 것 같다. 책 곳곳에 혁명가·지식인들의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이 생생한 까닭이다. 다음은 그 예다.

1955년 한 농부가 참새를 탓하는 탄원을 하자, 마오는 전국적인 참새 섬멸 작전을 명했다. 1958년에만 참새 2억1천만 마리가 살해됐는데, 그 이듬해 해충이 창궐했다. 마오는 다시 참새를 ‘복권’시킨다. 참새 박멸에 열 올린 아이들은 10년 뒤 홍위병 완장을 찼다. 참새와의 전쟁은 문혁의 전초전이었다. 한편, 홍위병 완장을 차고 ‘마오 만세’를 외친 저우언라이는 평생 마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천수를 누렸다. 저자는 문혁이 더 오래갔던 이유가 저우언라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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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사람 얘기를 위해 저자는 1980년대부터 중국·대만·홍콩 등 현지의 골동품 가게를 돌며 일기·서한·회고록·사진 등을 수집했다. 저자는 진짜 중국사는 사건보다 사람에 담겨 있다는 쪽인듯 싶다. 중국인들의 ‘뒷담화’까지 알뜰하게 긁어모아 중국 근현대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방식으로 재현·평가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좋아한 독자라면 저자의 평가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책에 담긴 저자의 이야기가 각주없이 너무 내밀한 탓이다. 풍부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건져올릴지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



아이들이 암에 걸리는 이유







4천~5천 종에 달하는 발암물질


샌드라 스타인그래버의 책 <먹고 마시고 숨쉬는 것들의 반란>(아카이브 펴냄)석면처럼, 우리가 만들고 버렸지만 공기·물·흙·음식에 스며들어 다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여성생태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두꺼운 침묵으로 둘러싸인 암과 환경의 숨은 관계를 고발한다.


통념에 따르면 암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은 유전자와 생활방식이고, 환경은 부차적 요인에 머문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암 발생에서 유전의 영향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생활방식의 개선을 암 예방법의 중심 요소로 다루는 반면, 환경 요인은 하찮은 문제로 취급한다. 이는 암이라는 질환의 원인을 개인 습관과 행동방식의 결과로만 국한해 결국 암 유발 물질의 노출 문제라는 사회구조적 요인을 간과하게 한다.


1973~2000년에 소아암은 22% 증가했고 사망률은 45% 감소했다.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구했으나 해마다 암 진단을 받는 아이들의 수는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암에 걸린 원인이 위험한 생활습관 탓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주는 직장에 다니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이 숨쉬고 먹고 마시기 때문에 공기, 음식, 물 속에 있는 화학물질이면 무엇이든 고스란히 흡수한다.”(91쪽)


석유화학물질은 빠른 속도로 출현해 그것의 생산·활용·폐기를 감독하는 정부 기능을 집어삼켜 무력화했다. 1976년이 되자 6만2천여 종의 합성화학물질이 상업 외 용도로 사용됐고, 이들 중 몇 개가 발암물질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8만 종이나 되는 화학물질이 우리 주변을 순환한다고 알려졌지만 그중 철저한 독성 검사를 거친 건 2%뿐이다. 시장에 화학물질을 들여오는 데 아무런 검사도 필요 없었다. 새로운 규제법이 생겼으나 기존 화학물질은 검사에서 면제됐는데, 그 수가 6만2천여 종에 이른다. 유해물질규제법이 1976년 발효된 이후 5개의 화학물질만이 시장에서 추방됐고, 사용금지된 화학물질은 극소수다. 독물학자들은 모든 화학물질의 5~10%가 인간 발암물질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4천~5천 종에 달한다. 국제 독물학 프로그램에서 발암물질로 판명된 300~400종의 화학물질 수를 빼면 우리 주변을 맴도는, 판명되지 않는 다량의 화학물질이 남는다.  2007년 미국 환경보호국은 발암물질로 확인되거나 의심되는 37만8522t의 물질이 우리 주변의 공기·물·흙 속에 배출됐다고 발표했다.



송건호 선생 10주기, 오늘의 언론상황 / 김삼웅


30년, 40년 뒤 당신들이 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자식들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라는
청암의 당부를 잊지 말라

어제(21일)는 청암 송건호 선생이 신군부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생활 끝에 영면한 지 10주년이다. 일생을 독립언론과 현대사 연구에 바치고 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고인은 우리 시대 언론인·지식인의 사표였다.

청암은 1999년 <기자협회보>가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장지연과 함께 선정되었다. 장지연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 훈장이 치탈되면서 유일한 ‘21세기 최고 언론인’이다. 그는 “나는 글을 쓸 때마다 30년, 40년 후에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생각한다. 크게는 민족을 위해, 작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는 자세로 글을 썼다.

청암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붓 한자루로 맞선 참 언론인이었다. 30대 초반부터 역사의 맥을 관통하고 불의와 비정을 고발하는 칼럼과 사설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언론인들이 독재에 부역하면서 온갖 악덕을 자행할 때 독재정권의 포섭 대상 영순위였지만 감투나 재물을 헌신짝 보듯 했다. 요임금이 벼슬을 주겠다고 권유하자 허유가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는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 그대로였다.

청암은 상식적인 지식인이었다. 몰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식대로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식에 어긋나는 독재와 싸웠고 상식에 어긋나게 기자들을 내쫓는 사주와 싸웠다. 달콤한 회유에도, 살벌한 협박에도 상식을 지키고자 했다. 상식을 접어두면 고관이 되고 신문사 편집국장 자리를 지킬 수 있는데도 눈앞의 이익보다 역사를 의식하며 고된 상식인의 길을 걸었다.

청암은 대단히 겸손하고 술 한잔도 할 줄 모르는 덤덤한 인물이지만 의기가 높고 용기도 있어서 6남매를 둔 가장이면서도 직장에 사표를 던질 줄 알았고 유신·5공의 광기에 맞섰다. 결이 고운 성품이어서 누구에게 독한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붓을 들면 불의한 자들이 식은땀을 흘리게 시비곡직을 가렸다. 매천 황현과 단재 신채호에 닿는 역사의 맥이다.

청암은 언론계에서 쫓겨나고 독재정권은 대학 강의도, 심지어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도 막았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사 연구에 팔을 걷었다. 그때까지 현대사는 황무지였다. 친일세력의 발호로 일제강점기와 해방후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어려웠다. 친일 잔재가 정치권력, 대학, 언론, 사법, 검찰, 재계에 포진하고 있어서 파헤치기가 쉽지 않았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근현대 연구가들이 하나같이 고중세사 연구가로 탈바꿈한 한국판이었다.

역사학계의 ‘직무유기’를 청암이 대신 해냈다. <한국현대인물사론>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언론사> 등 주옥같은 저서가 그것이다. ‘20세기 최고 언론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현대사 연구가’란 호칭도 손색이 없다. 그는 책상머리의 연구가는 아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장악에 나서려 하자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하고 선언문을 썼다가 5·17 뒤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죽음에 이르게 한 파킨슨증후군은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이다.

6월항쟁이 있기까지는 청암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를 만들고 <말>지를 발행하면서 재야언론인으로서 5공 비리와 폭압을 폭로하며 시민항쟁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겨레> 창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청암 선생 가신 지 10주년, 오늘의 언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쭈빗거리던 친일세력이 이제는 대놓고 식민지근대화론을 내걸고, 반통일 노선으로 일관해온 족벌신문은 이명박 정권과 유착하여 종편이라는 날개까지 달고 부패권력을 옹호한다.

송건호 선생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서울농대생 김상진군 자결 소식을 1단짜리 기사라도 싣게 했다가 권력·사주와 부딪치고, 자유언론의 물꼬를 텄다. 언론인들에게 당부한다. 30년, 40년 뒤 당신들이 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라는 청암의 당부를 잊지 말라고. 

김삼웅 <송건호 평전> 저자·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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