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


▲ 김근식 경남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포용정책에 관한 세 가지 오해

프레시안 : 책 제목이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해서>이다. 우선, 포용정책이란 게 뭔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면.

김근식 : 포용정책의 기조로만 보자면,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서부터 남북관계가 적대와 대결이 아닌, 평화적으로 서로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협력하고 교류하면서 북한의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용정책이 본격 시행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이고, 노무현 정부까지 10년 간 실행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북핵 문제가 터지면서 기본합의서가 휴지조각이 됐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핵문제로 내내 사이가 안 좋았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가서야 포용정책이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시행됐다고 볼 수 있다.
▲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김근식 지음. 한울 펴냄) ⓒ한울
포용정책은 냉전 시대를 종식시켰던, 상대국에 대한 관여의 정책을 뜻한다. 김대중 정부는 관여(engagement)를 '포용'이라고 해석해서 개념상의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국제정치학에서는 관여정책, 개입정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관여나 개입이라는단어는 정치적으로 쓰기에 부담이 있어서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에서는 평화번영정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관여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대방과의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둘째, 관계의 확대를 통해 상대 국가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김대중 정부 식으로 해석하면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이 자신감을 갖고 북한과의 화해, 협력, 접촉, 교류, 대화협상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증진시키고, 이를 통해 북한을 우리가 바라는 바람직한 방안으로 변화시켜서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는 대북 식량 지원, 남북 철도 연결,개성공단,금강산 관광 등으로 북한과의 접촉점을 늘려나갔다.

프레시안 : 포용정책의 내용과 목적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왜곡이 있었다.

김근식 : 내 책의 2장에 소개된 내용은 포용정책에 대한 논란을 다루고 있다. 포용정책에 관한 비판은 여러 가지이지만 크게는 셋으로 정리된다. 첫째, 관계 개선을 통한 변화라는 목적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남북의 관계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상호주의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이른바 '퍼주기' 논란 같은 게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햇볕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군사력 증강 시도를 막지 못했으니 결국 햇볕정책은 유화정책(상대국에 무조건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책)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논리적으로 일리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용정책이 실패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식 포용정책은 미국이 중국·베트남에 했던 포용과는 다른 맥락이 있다. 분단된 상대방을 대상으로 한 포용이기 때문에 특수한 성격을 띤다. 지구상에서 분단된 국가의 일방이 타방을, 그것도 서로 이질화된 체제에서 포용하는 것은 유례가 없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북한이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북한에는 미흡하게나마 꾸준히 변화가 진행되어 왔다. 북한 입장에서 남한의 관여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다. 자신의 체제 불안정 때문에 상대국과의 관계 맺기로 인해 급속도로 통일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변화가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포용정책이 틀렸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곧바로 성과를 내기가 어렵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상호주의 논란남북의 이질화로 인한 가치 체계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퍼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식량을 줬는데 북한은 국군포로를 송환시키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그러나 남측에서 보기에 식량 지원과 포로 송환은 모두 인도주의적 사안이지만,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국군 포로 문제는 그 무엇보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다. 그에 비해 식량 지원은 같은 민족으로서 해야 할 도리로 본다, 그렇게 가치 체제가 다른 상황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측의 요구는 북측의 눈으로는 일방주의로 비춰질 수 있다. 기계적 상호주는 쉽지 않고, 김대중 정부 시절의 유연한 상호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끝으로 포용정책이 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는 주장. 결과적으로 볼 때 핵 개발을 막지 못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핵 문제는 북미간의 문제이고 남한은 북미간의 핵 협상을 진전·촉진시켜 위기를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걸 포용정책과 연계하는 건 맞지 않다.

또한 햇볕정책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군사적 도발·팽창에 대한 철저한 봉쇄를 전제로 한 정책이다. 튼튼한 안보와 화해협력을 병행하는 것이다. 이를 유화정책이라 보는 것은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핵을 불용한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지만 이 때문에 전쟁까지 불사할 수는 없는 게 한반도의 현실이다. 핵을 없애기 위해 더디고 힘들지만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지 선제적 군사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남갈등, '소수의 과잉대표'에서 비롯"

프레시안 : 포용정책의 발전적 진화가 필요하다고 책에서 주장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김근식 : 구조적 관여(structural engagement)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는 포용정책을 포기한 결과 대북정책도 실패하고 포용정책을 펼치던 시절의 남북관계까지 망실시켰다. 대북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한 채 고립무원의 왕따가 됐다. 포용정책이 10년간 진행됐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도 그걸 뒤집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예상이었다. 내 책은 2013년에 들어설 새로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조언이다. 역진 불가능한, 비가역적인 남북관계의 구조화를 완성해서 정권이 바뀌어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구조적 관여'다.

프레시안 : 구조화된 포용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김근식 : 한 마디로 남북관계를 제도화 하자는 것이다. 장관급 회담이나 남북 경협사업을 법규화해서, 어떤 상황이 와도 합의를 거부하거나 불이행하지 않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발전적 진화'의 또 다른 측면은 북한의 변화와 관련된 것인데 진보 진영에 보내는 메시지의 의미도 있다. 지금까지는 탈냉전 시대를 맞아 남북 사이의 관계 확대에 치중한 게 사실이지만 포용정책이 구조화되면 그 다음은 북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이제 김정은 후계 체제가 시작됐는데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구조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 식량 지원, 경협 사업, 군사적 신뢰 구축을 할 때 이게 어떻게 북한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인 개입 방편을 궁리해야 한다. 진보 진영도 고민해야할 숙제다.

포용정책이 시작된 지 이미 15년이 지났고, 그 동안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김정은 시대라는 북한의 변화, 국내 여론의 변화, 북중관계 강화 등 대외적 변화도 있었다. 다양한 변화를 반영한 발전적 포용정책이 필요하다.

대북 인식과 관련해 일부 극단적 진보 진영의 과도한 친북주의나 수구 진영의 반북 정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반북 세력에게는 애북(愛北)의 관점이, 또 과도한 친북 세력에게는 지북(知北)의 관점이 필요하다. 진보 진영은 주사파냐 아니냐 같은 논쟁은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말 합리적인 대북정책을 고민하고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보면 북한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변화를 고민하는, 현실적으로 방책으로서의 포용정책을 생각해야 한다.

4장에는 남남갈등에 대해 썼는데, 남남갈등이 격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수가 과잉대표되기 때문이다. 원론적 친북주의자들이 진보의 전체인양 대변되고, 보수도 합리적 보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타도론에 입각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자는 이들이 보수의 전부인 것처럼 대표되는 현상이 남남갈등을 심화시킨다.






김근태 일대기

21살부터 박정희 정권 몰락 때까지 쫓겨다녀
민청련 주도…전두환 정권 ‘이근안 고문’ 맞서
정계입문 뒤도 ‘따뜻한 기품’ 유지 “국제 신사”

» 1964년 경기고 재학 시절 서울대 의대 외국인교수 숙소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가운데 왼쪽 둘째가 김근태 고문, 뒷줄 왼쪽 첫째가 정운찬 전 국무총리.
» 1965년 서울대 재학 시절 가을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물건을 파는 김근 태 고문.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츠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댕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 1978년 4월 서울 동숭동 흥사단에서 열린 부인 인재근씨와의 결혼식 장면.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해 12월19일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김근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는 전기고문 때 발뒤꿈치에 생긴 주먹만한 상처 딱지를 수거해 감옥에 따로 보관했다. 그해 12월13일 접견온 이돈명 변호사와 목요상 의원에게 상처딱지를 건네려했지만,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끝내 중요 증거물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망가진 신체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법원에 낸 ‘신체감정 증거보전’ 신청도 정권의 압력으로 기각당했다.

그러자 부인 인재근이 투쟁을 이어갔다.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로부터 고문의 실상을 기적적으로 잠깐 들은 인재근은 이 사실을 감옥 밖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이미자 노래테이프 중간에 고문 내용을 녹음한 다음 이를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스 등에 크게 보도됐으며,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그는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 1983년 9월3일 서울 돈암동 카톨릭 상지회관에서 초대의장을 맡은 김근태 고문이 부의장이었던 장영달 전 민주당의원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현판을 내걸고 있다.
» 1998년 7월 석방된 김근태 고문이 부인 인재근씨와 경북 김천교도소 앞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 구호를 외치고 있다.
» 1990년 5월1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던 김근태 고문이 제주에서 붙잡혀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수사관들이 그를 강제로 승용차에 태우고 있다.
» 1996년 4월12일 15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갑)으로 당선이 확정된 김근태 고문이 지지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자료사진, <한반도재단> 제공, 김근태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재야의 대표적 인물이던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기품을 유지했다. 항상 진지하고 정직한 그에게 동료들은 “국제신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1999년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백봉신사상’에 선정되고, 같은 해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에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자주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를 얻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김근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때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맞서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그해 4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항의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정부의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에 반대해 김근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해내겠다”며 국민연금 지키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을 휩쓴 ‘반 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김근태는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18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진실] 제1편 - 사랑을 시작하다



[진실] 제2편 - 어둠속의 외침



[진실] 제3편 - 부끄러움 없이는 말할수 없는 이름



[진실] 제4편 - 그때 그 순간



[진실] 제5편 - 8인의 사형수



[진실] 제6편 - 1980년 사북의 봄



[진실] 제7편 - 가슴에 묻은 내 아들



[진실] 제8편 - 우리 편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 제9편 - 작사,작곡 미상



[진실] 제10편 - 거리의 신부들



[진실] 제11편 - 남영동의 두남자







[진실] 8인의 사형수, 그들은 무죄였다



[진실] 제12편 - 죽음의 시대



[진실] 제13편 - 나의 친구 박종철



[진실] 제14편 - YH여공 김경숙



[진실] 제15편 - 영원한 재야, 영원한 청년



[진실] 제16편 - 국가보안법의 굴레



[진실] 제17편 -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진실] 제18편 - 10.26



[진실] 제19편 - 이미지의 전사들



[진실] 제20편 - 펜과 칼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① 김지태 씨 '박정희 혁명자금' 거부하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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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① 김지태 씨 '박정희 혁명자금' 거부하다 결국…
5·16 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 부산일보 DB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1면엔 충격적인 사진이 실린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군의 주검 사진이 게재된 것이다. 당시 부산일보 사장은 김지태 씨였다.

김 씨는 부산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삼화고무와 조선견직, 한국생사 등 많은 기업을 경영했고, 2, 3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특히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현 MBC), 부산문화방송(부산 MBC) 등을 소유한 언론사주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언론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부산문화방송의 주조정실을 부산일보 사장실로 옮겨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와 4·19 혁명을 생생하게 송출하게 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4·19 혁명이 점화되는 과정에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큰 역할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김 씨가 있었다.

그는 1958년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를 설립해 4년간 총 1만 2천364명에게 17억 7천만 환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당시 군수기지사령관과의 어긋난 인연으로 김 씨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군 실력자로 부산에 내려온 박 사령관과 부산이 낳은 '전국구' 기업인인 김 씨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런데 1961년 박 사령관이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가 문제였다. 박 사령관은 5·16 직전 김 씨에게 자금을 요청했고, 김 씨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씨의 아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박 사령관이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전 부산일보 주필을 통해 아버지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자금 요청 건과 관련해 박 사령관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온 적도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박 사령관과 김 씨의 관계는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 명단에 김 씨가 포함됐다. 이어 1962년 4월 김 씨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돼 구속 수감되고 말았다. 김 씨의 유족은 "5·16 거사 자금 500만 환(약 5억 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② 군사정권, 김지태 씨 개인재산 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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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② 군사정권, 김지태 씨 개인재산 강탈
부산일보 주식을 5·16장학회에 넘기겠다는 내용의 기부승낙서. 김지태 씨가 서명하고 날인했다. 부산일보 DB


1962년 4월 초 어느 날 새벽, 김지태 씨의 부인 송혜영 씨의 자택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송 씨는 다짜고짜 끌려갔다. 해외여행에서 반지 하나와 카메라 한 대를 산 것을 두고 밀수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송 씨는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 씨를 국내로 불러들이기 위한 '인질'이었다. 며칠 후 김 씨는 국내로 들어왔고, 곧바로 체포돼 4월 24일 부정축재 혐의 등 9개 혐의로 구속됐다. 군검찰은 5월 24일 김 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결국 김 씨는 구형 다음 날 5월 25일 재산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6월 20일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서울문화방송, 부일장학회 및 부산시내 토지 10만여 평 등을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옛 명칭)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내용의 '기부승낙서'에 서명 날인했다. 김 씨는 그 이튿날 공소 취소로 석방됐다.

이를 두고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5년 '김지태의 재산헌납은 표면상 자발적으로 기부된 것으로 보이나 구속수감 중인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기부승낙서의 날짜 변조 사실도 확인했다. 6월 20일 구속 수감상태에서 기부했다는 의혹을 지우기 위해 날짜를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했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으로 확인한 것.

실제 김 씨도 1976년 발간한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며 부산일보 등을 강제로 헌납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구속된 조건 아래 그런 서류를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 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고 회고했다.

김 씨의 큰 아들인 김영구 씨도 언론 인터뷰에서 "그 해 5월 25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내가 장남이라 인감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군사정부가 개인재산을 '강탈'해 '5·16장학회'에 넘긴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포기는 헌납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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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③수조 원대 재산 박정희 일가로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김지태 씨로부터 '강탈'해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옛 명칭)에 넘긴 재산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강제 헌납된 부산일보 주식 100%와 한국문화방송(현 MBC)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부일장학회 소유 토지 10만 평 등의 당시 평가액은 총 8천500만 원이다. 이 중 현재 시가로 1조 원으로 추정되는 부산시내 토지 10만 평은 1963년 국방부에 양도됐다.

나머지를 포함해 현재 정수장학회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부산일보 주식 100%(20만 주)와 MBC 주식 30%(6만 주), 서울 정동의 경향신문사 부지 2천385㎡(723평) 등이다.

언론사 주식은 비상장 주식이어서 시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산일보는 한국 제2의 도시에서 발행되는 전국 5위권 내의 유력 신문이다. MBC는 최대 지상파 방송사 중 하나다. 경향신문사 부지는 평당 수천만 원에 이르는 금싸라기 땅이다. 2005년 언론노조는 정수장학회 재산을 최소 1조 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MBC가 민영화 될 경우 자산이 최대 1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는 만큼 정수장학회의 재산 가치는 수조 원에 달할 수도 있다.

정수장학회의 재산은 대부분 김지태 씨로부터 강제 헌납 받은 재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김 씨의 재산이 당시 5·16장학회로 넘어간 부분이다.

설사 김 씨에게 범죄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면해주고 재산을 강탈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 재산을 국가에 귀속한 게 아니라 또 다른 단체에 넘겨준 것은 법과 원칙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그런데 5·16장학회와 그 이름을 바꾼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과 일가들이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부정축재의 수단"이라고 규정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수장학회에 대해 "범죄의 증거이자 장물"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지태 씨 수사를 지휘한 박용기 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조차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죄가 있으면 처벌하면 되지 재산을 뺏는 것은 잘못됐다. 그것도 국가에 재산을 헌납했으면 문제가 없지만 5·16장학회를 만든 것은 문제였다. 특정인에게 재산이 갔으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고 회고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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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④ '부정축재' 유산, 박근혜 의원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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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④ '부정축재' 유산, 박근혜 의원 승계
1970년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김지태 한국생사 대표. 그의 표정이 밝아보이지 않는다. 김지태 평전


1962년 7월 5·16장학회가 출범했다. 김지태 씨로부터 강탈한 부산일보와 MBC 등이 기본재산이었다. 김 씨의 재산은 국고에 환수되지 않은 것은 물론 국유재산법 등에 따른 절차도 거치지 않고 5·16장학회로 이전됐다.

이 모든 과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 당시 기부승낙서에 김 씨의 날인을 받은 고원증 전 법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62년 6월께 '중앙정보부가 김지태 씨한테서 기부 받아둔 재산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박정희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내려갔다"고 증언했다.

이후 5·16 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 동창, 행정부 각료 등이 이사장과 이사진을 장악했다. 이를 두고 백원우 국회의원은 2005년 "완벽에 가깝게 박 전 대통령의 사유 재산화 됐다"고 말했다. 부정축재를 했다는 이유로 남의 재산을 빼앗아 결국 자신이 부정축재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16장학회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1982년 1월 이름을 '정수장학회'로 바꾼다. '5·16'이란 이름을 바꾸라는 전두환 정권의 요구에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를 따서 개명을 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부정축재의 유산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고스란히 승계됐다. 80년대 들어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에는 조태호(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서), 김창환(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김귀곤(정수장학회 출신자 모임 상청회 고문) 씨 등 박 전 대표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앉았다. 박 전 대표는 1995년 직접 나서서 2005년 물러날 때까지 10년간 이사장을 지냈다. 연봉은 2억 5천만 원까지 받았다. 2005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논란이 되자 박 전 대표는 이사장 자리를 박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의 최필립 씨에게 넘겨준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이사장을 그만뒀기 때문에 정수장학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수장학회에 대한 지배권이 여전히 박 전 대표에게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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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⑤ "강탈 결론·권고 무시 버티기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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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⑤ "강탈 결론·권고 무시 버티기 일관"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 빌딩에 있는 정수장학회 사무실. 부산일보 DB

정수장학회와 그 전신인 5·16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50여 년간 끊임없이 불거졌다.

김지태 씨 본인은 1962년 석방 직후부터 "부산일보 등 재산을 구속상태에서 탈취당했다"며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국회에서는 1964년 12월 당시 민주당 정일형, 서민호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정치쟁점화 됐으며,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도 5·16장학회의 탄생배경을 폭로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했다.

1988년 부산일보 노조가 5일째 파업을 벌이며 편집권 독립투쟁을 할 때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해 '부산일보 등의 소유권 원상회복' 등이 국회에 청원됐고, 14명의 부산 출신 국회의원 전원이 소개의원으로 서명 날인했다. 1993년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도 국정감사를 통해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급기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부일장학회 헌납 의혹 사건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인 언론자유와 사유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다"고 규정했다.

위원회는 "강압에 의해 헌납됐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며 "박 전 대통령과 그 유족을 중심으로 사유재산처럼 운영되었던 정수장학회를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김지태 씨의 유지를 되살릴 수 있도록 쇄신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2007년 "부일장학회가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 헌납됐다"면서 "정수장학회는 강제 헌납받은 주식을 국가에 원상회복토록 하고 원상회복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가가 직접 원소유주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정수장학회와 실질적 '오너'인 박근혜 전 대표는 정부기관의 결론과 권고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법적인 강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특히 최근 부산일보 사태가 불거지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 심지어 보수언론조차 박 전 대표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데도 요지부동이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언제까지 국가적인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