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평화사상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향로'

한반도평화포럼, 인제대학교,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하는 제2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가 30일 첫 강의를 시작했다.

이날 제1강에서는 한반도평화포럼의 공동이사장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김대중의 평화사상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향로'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임 이사장의 강연문을 아래와 같이 전문 게재한다.



김대중의 평화사상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올해 우리는 6.25 전쟁 61년을 맞았다. 적화통일을 위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국제전쟁화했고, 3년간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구의 1/6인 500만 명이 희생되고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통일도 평화도 가져오지 못했고, 휴전은 냉전으로 이어졌다. 60년이 된 오늘날도 남과 북은 승패의 대결을 일삼으며 6.25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전쟁의 재발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전쟁을 억제하여 평화를 지킬 뿐 아니라 적대관계를 해소하여 평화를 만들고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중단된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다시 추진하도록 국민들이 결단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김대중의 평화사상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되살펴보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자료사진

김대중의 평화사상과 통일철학

2000년도 노벨평화상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여되었다. 노벨상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이 "수십년 동안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화해 협력을 통해 냉전의 잔재를 제거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이 평생 추구한 가치는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였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와 평화는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천되면 전쟁은 불가능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평화사상은 민주주의의 가치에기초를 두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평화사상은 사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진 사상이라는 특색을 갖고 있다. 한국의 현실정치, 남북관계 그리고 대외관계에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또한 직접 실천해 낸 사상이다. 그의 위대한 삶에서 용서와 화해, 자유와 정의, 관용과 평화를 보게 된다. 그의 실천적 삶은 일생을 '행동하는 양심', '참여와 실천의 리더십'으로 빛나고 있다.

김대중의 평화사상은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그 핵심 실천과제로 하고 있다. 그의 통일철학은 평화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통일은 남북이 상호 인정하고 화해 협력하며 평화를 만들어 나가면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평화통일철학은 1970년대 초 이래 역사적인 상황 변화에 적응해가면서 1995년에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집권 후 화해 협력의 햇볕정책으로 실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마침내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한 남북 간의 접점(接點)을 마련하고. 반세기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나감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1970년대 초,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힘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던 시기에 젊은 정치인 김대중은 전쟁을 반대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남한이 승공통일을 주장하고, 북한은 적화통일을 위한 혁명전쟁을 선동하는 등 정치·군사적 대립이 첨예화되던 시기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 소련과 중국 4대국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4대국 안전보장론'과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선(先) 평화 후(後) 통일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북한을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북진통일과 승공통일을 외치던 때에 북한과의 대화와 평화통일을 주장한다는 것은 냉전적 반공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적들은 그의 사상이 이상하다며 용공, 급진, 좌파, 빨갱이로 몰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무렵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의 책임"임을 선언하고 월남전 종식을 추진한 닉슨독트린(1969), 미국과 중국의 화해(1971), 중국의 유엔가입(1971), 일본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1972), 그리고 동-서독일 정상회담(1970)격변하는 국제정세를 활용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받고 남북관계도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세정세의 변화를 꿰뚫어 보는 미래지향적인 혜안을 가지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4대국 안전보장론'은 오늘날 6자회담과 '동북아안보협력체' 추진으로 이어졌고, '남북의 유엔동시가입'은 1992년에 실현되었다.

1980년대 말 그는 연합-연방-완전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한다. 국제 냉전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국내에서는 6월 민주항쟁으로 국민들의 민주화와 통일의 열기가 고조되어 가던 때이다. 이 통일방안은 통일을 '선 민족사회통합, 후 국가통일'이라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과도적 통일체인 '남북연합'을 거쳐 이룩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 우리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89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평화통일론은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1995)으로 완성된다. 그는 평화통일은 갑자기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단계적으로 이룩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과 북이 각각 주권국가로 평화공존하면서 교류 협력하는 '연합' 단계를 거쳐서, 북한이 주장하는 2체제 연방제가 아니라, 1체제 연방제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통일 이전의 남북연합 단계에서 수행해야할 과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평화적 교류 협력을 통해 정치 군사적 통합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제시한 내용이 집권 후 대북정책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화해 협력으로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

우리민족의 지상 과제는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
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번영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분단 상태에서는 정통성 독점 경쟁이 불가피하며, '승패의 게임'의 유혹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항상 갈등과 분쟁, 군비경쟁, 그리고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게 되며, 민족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고로, 최근 정부 산하 연구기관이 발표한 통일비용 추계에 따르면,
북한이 급격 붕괴시에는 30년간 매년 720억 달러가 소요 되지만, 정상 발전시에는 그 1/7인 매년 1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계했다. 우리나라의 금년 국방비가 약 300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통일비용이 분단유지비용보다 적게 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룩하려는 통일은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 시장경제 아래 번영 발전하는 정의로운 복지국가, 적정한 자위력을 갖춘 평화애호국가의 건설이다.

문제는 통일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2000년 6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장시간의 토론과 설득을 통해 통일문제에 관해 공통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평화공존을 통한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평화통일을 어떻게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무력통일이나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하는 흡수통일은 통일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을 배격하고 평화를 만들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평화적인 통일은 갑자기 이룩될 수 없으며, 우선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여 점진적 단계적으로, 소통과 변화의 과정을 통해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인 것이다.

우선 남과 북이 상호 인정하고 화해 협력하며 평화공존 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 오고 가고 돕고 나누면서, 통일은 되지 않았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 즉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 상황부터 먼저 실현해야 한다.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하여 분단으로 인한 겨레의 고통을 줄여가며 서로 소통하고 신뢰를 다져나가면서 민족동질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상생 공영하며 변화와 창조의 과정을 통해 '법적인 완전통일'(de jure unification)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은 스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현재진행형으로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10%, 25%, 60%,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긴 과정인 것인 것이다. 한반도 특유의 '과정으로서의 통일' '현재진행형 통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남북연합'을 통해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추진하고 공동으로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만의 일방적인 노력으로는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긴 과정을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관리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협력기구가 필요하다. '남북연합'은 통일국가의 형태가 아니라 통일 이전 두 주권국가 간의 협력기구를 말하는 것이다.

북측 지도자도 '남북연합'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만 북은 그 명칭을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호칭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제2항)을 통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한다"고 합의하게 된다.

북측 지도자는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이 즉각 '연방제'로 통일부터 하자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냉전시대의 산물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연방제가 되려면 외교와 군사권을 통합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군대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이 평화를 만들어 완전통일을 추진하는 긴 과정을 효율적으로 공동 관리해 나가자는 남측의 '연합제'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p.102-105)

일부 반북인사들이 6.15 공동선언은 북측의 연방제 주장을 수용한 것이라고 색깔론을 제기하며 폐기를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오해이거나 아니면 고의적인 사실 왜곡일 것이다. 사실상 이미 폐기 상태인 북측의 2체제 연방제를 우리가 수용한 것이 아니라 북측이 우리의 연합제를 수용한 것이다.

평화와 통일은 한반도문제에 깊이 개입해온 국제세력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주도하여(열린 자주) 국제세력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이끌어 내어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피스메이커> p.400-406)

한반도문제는 민족 내부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통일에 앞서 평화체제를 구축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냉전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미국, 일본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고 관계정상화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 중국과 남북한 4개국 평화회담을 통해 군사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관련국의 지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남과 북은 1991년 말 탈냉전의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는 강령적 합의서를 채택했다. 상호 체제를 인정 존중하며 화해하고,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추진하고, 전쟁하지 말고, 불가침을 보장하기 위해 군비감축을 실현하며,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해 나가자는 훌륭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이다. (<피스메이커> p.228.)

그러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 개선이 어렵다는 현실에 부닥친 것이다. 1990년대 초 소련과 중국은 대한민국과 관계정상화하고, 남북이 모두 유엔에 가입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적 봉쇄정책을 계속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 지도자들의 냉전적 대북시각과 민족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결여도 걸림돌이 되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한반도평화프로세스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평화가 동북아의 평화 안보 협력체제 구축에 추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며, 동북아 평화는 한반도 평화를 담보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역사적인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 대통령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여 미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공동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실천에 옮기기로 하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제네바 미북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한 미국도 북한 특사를 맞아 미북관계 개선의 이정표에 합의하는 미북공동코뮈니케를 채택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정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미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피스메이커> p.495) 일본도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하는 평양선언을 채택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김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목표를 화해ㆍ협력을 통해 북한이 변화(개방과 시장경제 개혁)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고, 평화를 만들어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하는데 두었다. 화해, 협력, 변화, 평화가 햇볕정책의 네 가지 키워드이다.

그의 햇볕정책은 결코 순진한 것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둘째, 흡수통일 할 생각이 없다. 셋째, 화해 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대북정책의 3대 원칙을 천명했다. 확고한 안보태세를 유지하면서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즉 평화를 지키면서 평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변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나가기 위해 보다 많은 접촉과 교류·협력을 추진한다. 북한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신뢰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북한 주민들과 보다 많은 접촉과 다방면의 교류 그리고 인도적 지원을 통해 이들의 의식 변화를 유도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남북왕래 인원이 휴전 후 집권 때까지는 3000명에 불과했으나 집권이후 10년간 44만 명에 이르렀다) 서독의 경우처럼, 북한 동포에 다가가서 이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즉 민심을 얻는 것이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협력을 활성화하여 '남북경제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자 했다. 경제적 접근을 통해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평화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 보았다. 유럽국가들이 경제공동체(EEC) 형성을 통해 국가연합(EU)으로 발전하고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또한 독일통일의 후유증에서 교훈을 얻어 정치적 통일에 앞서 남북 협력을 통해 경제 사회 통합부터 추진하려는 것이다.

우선 시범사업으로 개성공단을 건설하기 시작했다.(현재 개성공단에서는 120여 남측기업에서 근 5만 명의 북측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이를 더욱 확대 발전시켜 남북경제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끊어진 민족의 대동맥인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금강산 관광(190만 명)을 비롯한 관광 사업을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교역을 활성화하고 경제협력과 지하자원의 공동개발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남북철도의 연결은 남북간 교통뿐만 아니라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하여 북방으로 진출하고 한반도를 물류중심지로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10.4 선언을 통해 남북 협력사업을 40여 개로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분쟁의 바다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전환하기 위하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북한 주민의 생존적 인권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다. 지난 정부 10년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4000가족 2만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고, 년 평균 2억4000만 달라 분량의 식량,비료,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이 제공되었다.(서독의 $32억/년에 비하면 1/13) 햇볕정책 반대자들은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난했지만, 김 대통령은 인도적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북한 인권문제 해결 차원으로 접근했다.

그는 북한에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인권은 물론이려니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적 인권도 최하의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식량과 비료, 의약품 등을 지원함으로써 북한의 생존적 인권 해결에 도움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시민적 인권은, 공산권 국가에서는 외부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해결된 예가 없고,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여 민주화되었을 때 해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미국 등 우방국에 대해 북한과의 대화 협상을 통해 북한을 개방 개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인권문제 해결의 바른 길임을 역설했다.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햇볕정책이야 말로 인권문제 해결의 바른 길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북한 핵개발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한반도는 반드시 비핵화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북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로서 미-북관계가 정상화되고, 평화가 보장될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김영삼 정부는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면서 '선 핵문제해결 후 남북관계'를 주장하며 '핵연계전략'으로 남북관계를 파탄시켰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 이행에 기여하는 한편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병행전략'을 추진했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로 이러한 전략구상으로 추진된 것이다. 2005년 6자회담은 9.19 공동성명을 통해 북핵 폐기와 미북관계 정상화를 병행 추진하기로 재확인하는 한편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관련 당사국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남북관계 경색과 당면과제

이명박 정부는 전 정부의 대북정책은 잘못된 것이라며 차별화를 추진했다. 북한을 '점진적 변화론'이 아니라 '붕괴 임박론'의 시각에서 보고, 점진적 단계적 '평화통일'이 아니라 급변사태와 '흡수통일'을 바라고 있다. 따라서 대북정책은 '화해·협력정책'이 아니라 북한의 굴복과 붕괴를 도모하는 압박과 제재의 '대결정책'을 선호하게 된다. 또한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인 북핵문제를 관계개선과 함께 해결하려는 '병행전략'이 아니라, 실패한 네오콘식 접근방식을 답습한 '선 핵해결 후 남북관계'라는 '연계전략'을 고집하여 핵문제 해결에 기여하지도 못하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 못지않게 긴요한 것은 전쟁을 방지하는 것
이다.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핵폭탄을 소량화·경량화하여 미사일에 장착한 핵무기를 만들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미래의 위협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군사적 충돌이 전쟁으로 확전되는 것은 당장 당면하게 되는 현재의 위협이다. 남한에는 21개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전쟁이 일어나 원자력발전소가 피격된다면, 핵공격을 당한 것과 마치가지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핵 폐기와 미-북관계 정상화를 맞바꾸기로 하는 한편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에 합의한 6자회담의 9.19 합의를 이행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6.15 공동선언을 준수하여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굴복시키고 붕괴시켜야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북한과 화해하고 교류 협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심지어 북한 동포들이 굶주림에 허덕여도 식량이나 비료 등 인도적 지원도 하려하지 않는다. 붕괴를 촉진하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압박과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백기를 들 것이고 망할 것이라며 붕괴를 촉진시키려는 것이 적대적 대결정책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이명박 정부는 햇볕이 아니라 거센 돌풍을 일으켜 북한의 옷을 벗기고 무릎을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화해·협력의 공든 탑은 무너지고 남북관계는 악화되었으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을 촉진하는 역효과를 초래했고, 또한 북한이 중국의 경제적 영향권에 빨려 들어가게 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남과 북은 사사건건 갈등, 반목, 대결하게 되며 긴장은 고조되고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평화를 만들기는커녕 평화를 지키기도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금강산, 천안함, 연평도 사건 등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는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에 입각한 대북 적대시정책이 위기의 근본원인임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급변사태를 기다리면서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오만한 정책으로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북한의 불안정과 위기는 한반도의 불안정과 위기를 초래한다. 장기적인 비전이 없는 이러한 근시안적인 정책으로는 평화와 통일은 멀어지고 긴장이 고조될 뿐만 아니라 북한이 중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까 우려된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때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근시안적인 대응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남북관계를 개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적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불신과 대결이 아니라 화해 협력해야 한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as it is)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변화를 유도해 나가야 한다. 남과 북이 지난 20년 동안 지혜를모아 마련한 일련의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공동선언, 그리고 10.4선언을 이행해 나가야 한다. 또한 6자회담 9.19 합의를 이행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는 6.25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억제하여 평화를 지킬 뿐 아니라 적대관계를 해소하며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손자는 싸워서 이기는 것 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전략(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며 부전승 전략을 갈파한 바 있다. 싸우지 않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평화를 만들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통일철학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산출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분단 반세기의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 놓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은 그토록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시작을 해냈다. 나머지는 남은 사람들이 채워나가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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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언론개혁 해법 ①교과서부터 바꾸자


언론개혁,교과서부터 바꾸자 


친일행적 신문을 항일 민족지로
한국판 교과서 왜곡
중.고 역사책“민족신문인 조선.동아”
94년 개편논의 색깔공세로 무산시켜
“조선.동아 친일 기술해야
민족지 표현도 고칠 필요”

교사등 재수정운동 꿈틀

<한겨레>는 기획연재물 `심층해부, 언론권력' 1·2부를 통해 족벌신문들의 `횡포'와 `추악한 과거'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러나 족벌신문들은 언론정상화의 도도한 흐름을 틀어막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부에서는 신문이 시민사회 성숙에 봉사하고 민주주의와 국민의 알 권리에 복무하는 참된 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 `해법'을 찾아본다.편집자주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을 언론기관의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사건이라고 쓴 중학교 국사교과서 하권(153쪽·사진 위)과 조선·동아일보가 온갖 박해를 받다 폐간됐다고 쓴 중학교 국사교과서 하권(145쪽). 그러나 교과서는 동아일보보다 10여일 앞서 일장기 말소 사진을 게재했다가 정간당한 뒤 폐간한 <조선중앙일보>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고, 친일에 앞장선 사실도 생략했다.



1.교과서부터 바꾸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미화한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교과서를 성토하는 대열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신문들은 우리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을 질타하며 강력한 대처를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내부 또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친일의 `추악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의 역사왜곡만 비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친일매족을 일삼던 신문들이 자기 반성은 하지 않고 일본 교과서 문제만 떠드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행태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 친일매족에 앞장선 전력이 있는 일제강점기 신문들이 지금도 항일민족지로 기술돼 있는 사실이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일제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위들은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은 채 마치 항일만을 하다가 강제폐간된 것처럼 쓰여 있는 것이다.

문제의 교과서는 1996년 개편이 완료돼 97년부터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하권이다. 이 가운데 중학교 국사교과서 하권 145쪽 하단에는 “민족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실력양성운동에 앞장섰다. …이들 언론의 활동에 대하여 일제는 기사의 검열과 삭제, 휴간 및 정간 등의 갖은 탄압을 가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 내용이 실린 단원은 3·1운동 이후부터 해방이전까지를 다룬 `Ⅵ. 민족의 독립운동 4.국내의 독립운동'이며, 145쪽 상단에는 `조선일보의 문맹퇴치 운동 기사'와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기사'가 사진으로 실려 있다.

또 같은 교과서 152~3쪽에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의 검열제도에 대항하면서 민족사상의 고취, 민족의사의 대변, 민족문화의 계승, 재난동포의 구호 등 민족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일제의 이와 같은 언론기관의 활동에 대하여 언론인 구속, 신문압수, 발간정지 등의 탄압을 가하였으며, 마침내 1940년경에는 이들 민족신문을 모두 폐간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가 이미 보도한 대로(3월 29일, 30일, 31일 1·3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말기에 해마다 1월1일 1면을 털어 일왕 부부의 사진을 크게 싣고 “천황 폐하의 성덕”을 찬양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또 일왕의 생일을 민족의 명절인 양 봉축하는가 하면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후방의 백성들에게 전쟁물자를 내놓도록 독려하는 친일매족에 앞장섰다. 이들의 폐간도 항일의 결과가 아니라 전시체제하 물자절약 차원이었음도 이미 밝혀졌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민족언론'으로 기술한 것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국사는 `Ⅲ. 민족의 독립운동 (1)식민지 문화정책' 단원이 실린 하권 172쪽에 “국권 침탈과 함께 한국인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신문은 모두 폐간되었으나, 3·1운동 이후에는 이른바 문화통치에 의해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발행이 허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지들은 일제의 검열에 의해 기사가 삭제되거나 정간·폐간되고 언론인들이 구속되는 등 온갖 박해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한일장신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무수한 친일매족적 언론행위가 역사적 사실로서 엄존하고 있는데도, 국사교과서마다 두 신문의 친일언론활동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민족지라고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교과서로 국사를 배운 청소년들이 민족의식을 제대로 가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현행 국사교과서는 개편 당시에도 내용 기술과 관련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조선일보 등 `언론권력'들은 국사교과서 제 6차 개편 준거안이 발표된 1994년 3월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원회'의 일부 집필자들의 사상과 `색깔'을 문제삼으며 개편 준거안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 준거안은 근·현대사 부분에서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 일본어 사용 강제, 신사참배 강요, 일본식 성명으로의 개조, 황국신민화 정책 등을 설명하되, 이 과정에서 노골적인 친일세력이 형성됐음을 설명한다”, “일부 민족지도자들이 일제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과 침략전쟁에 협력하였음을 간략히 기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내용대로 국사교과서가 기술됐다면 친일 행위와 관련된 부분이 현재와는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준거안에 대해 조선일보는 `대구폭동'을 `10월항쟁'이라고 한 점, `제주 4·3'을 `제주 4·3항쟁'이라고 표기한 점 등을 들어 “대한민국 건국사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며 이 문제를 `색깔론'으로 비화시켰다. 조선일보의 이런 식의 주장에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도 동조했다. 이 와중에 친일파를 기술한다는 내용은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고 교과서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해방 후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 부분이 간략히 들어간 정도(고등학교 국사 하권 197쪽)가 성과라면 성과다.

94년 당시 준거안 준비위원장이었던 이존희 명예교수(서울시립대)는 “당시 준비위 연구자들이 세미나를 통해, 해방된 지도 오래됐고 하니 이번에 친일파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며 “그런데 `대구폭동' 문제 등으로 보수적인 주장들이 과도하게 부각되면서 친일파 문제는 덮여버리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교수는 “사회적 분위기가 언론 등을 통해 유도되면 학자들이 편하게 갈 수 없다”며 교과서 개편에 언론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했다.

당시 현대사 서술의 준거안을 만든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사학)는 “준거안의 내용 일부가 알려지면서 (언론이) 민주주의 운동이나 독재정권의 헌정문란행위, 친일파 문제 등에 대해서는 꼬투리잡기가 어려워 `10월항쟁' 등을 문제삼아 전반적인 공세를 취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행 국사 교과서가 지닌 문제가 알려지면서 이를 시정해야 한다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그 하나가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공동대표 김동민·문규현·오종렬·홍근수)다.

곽태영 4월혁명회 조국통일위원장이 17일 조선일보 본사 앞에서 조선일보의 친일행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김종수 기자



이 단체는 지난 2일 국사 교과서의 `왜곡서술'과 관련해 `중등학교 국사교과서 일제하 언론관련 부분 수정 요구서'를 지난 2일 교육부 장관 앞으로 제출했다. 이들은 요구서에서 “과거 친일행적으로 해방을 늦추고 민족의식 마비에 일조했다고 평가받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마치 민족지인 듯 교과서에 기술돼 있다”며 “관련부분을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직 역사교사들도 이런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다. 전국 역사교사 8천여 명 가운데 2천여명이 가입한 전국역사교사모임(대표 정용택)은 현재의 국정교과서와는 별도로 대안 교과서를 집필 중이다. 집필에 참여하고 있는 양정현 교사는 “현행 교과서가 반민족행위자인 친일파 문제를 왜 정면으로 다루지도 못하고 언급도 안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친일파 문제를 교과서에 솔직하게 기술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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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나치 부역' 숨김없이 서술


“실로 우리 독일인은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들이 지은 죄 앞에 마주 서야 하며 그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죄과에 대한 질문을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답변에 따라, 존재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이 달라질 것이다….”(카를 야스퍼스 <독일의 죄과>(1946))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는 나치 점령하 프랑스인의 부역행위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은 친나치신문 <르프티파리지앵>의 1940년 10월 26일치. 히틀러와 나치괴뢰정부 수반 페탱의 얼굴을 1면 머리로 올려 그들을 선전하고 있다. 프랑스는 해방 뒤 나치 부역언론인을 철저히 숙청하고 친나치신문들을 폐간시켰다.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 말은 프랑스의 고3 학생을 위한 역사 교과서에 알베르 카뮈의 <쓰라린 승리>(1944)와 함께 실려 있다. 프랑스의 역사가 영예로운 것만은 물론 아니다. 4년 간의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활동가들도 많이 있었지만 부역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프랑스의 역사 교과서는 콜라보(나치 부역자)들의 부역 행위를 숨기지 않고 레지스탕스와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부끄러운 역사를 견주어 보게끔 하는 것이다. 또 비시 정권을 `국가의 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조국을 위해 나치 부역에 앞장서라고 종용했던 당시의 선전 포스터들을 그대로 싣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왜곡하여 기술한다고 그 잘못된 역사가 사라지지 않듯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숨긴다고 그 부끄러운 역사가 사라지지 않음은 단순한 진리에 속한다. 전자의 상반되는 예를 일본과 독일이 보여준다면, 후자의 상반되는 예를 한국과 프랑스가 보여주는 게 아닐까. 가령 <기미독립선언문>의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에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제대로 기술하고 있는가? 우리의 역사 인식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친일 부역 행위에 가장 앞장섰던 <조선일보>가 민족 앞에 사죄 한마디 없이 `민족정론지'라고 떠들고 있는 데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신문이 `일등신문'이라고 자랑하는 현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당연한 분노조차, 보잘 것 없는 역사 인식과 낮은 차원의 쇼비니즘(국수주의)이 만나서 나온 게 아닌지 묻게 한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에서 저지른 행위의 증언과 희생에 관한 <르몽드>의 조심스런 보도 태도는 독자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겐 거꾸로, 우리에게 반대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반역 행위가 된다. 헤어나기 어려운 곤경이다.”(<르몽드> 1957년 3월13치)

<르몽드>의 창설자 위베르 뵈브-메리의 글이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시작될 무렵, 프랑스의 국가 이성과 지배 여론이라는 압력과 탈식민이라는 세계사적 역사 인식 사이에 처한 `기자의 곤경'을 실토하고 있는 이 신문기사 또한 프랑스의 고3 학생용 역사 교과서에 나와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해 30년 뒤에 반성을 촉구하며 기사화했던 <한겨레21>과 그 때문에 신문사가 당했던 일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인들이 내일 반성하지 않을 오늘을 위해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역사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홍세화/<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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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여, 대선 앞두고 언론문건 작성' 파문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지난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언론사 경영진 및 간부의 성향을 파악하는 등 언론을 활용, 장악하기위한 언론대책문건을 작성했다고 월간 `말'지가 폭로, 파문이 일고 있다.이에대해 한나라당은 20일 `괴문건'으로 간주, 정치적 악용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선 반면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대해 진상공개를 요구하는 등 여야 공방이 확산되고 있다.

`말'지가 5월호에서 A4용지 400장분량의 대선기획문건중 일부라며 공개한 언론문건에 따르면 신한국당은 15대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언론사 부장급 이상 간부 및 논설위원, 정치부기자 등을 대상으로 성향과 인적사항을 분류해 데이터베이스화, 언론대책에 활용하는 방안을 기획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언론사 경영진 관리수단으로 통합방송법과 공정거래법을 활용하고, 매체별로는 TV의 경우 여권이 분위기를 완전 장악토록 유도하고, 신문은 유력지를 중심으로 비판논조 차단에 주력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에대해 한나라당 장광근 수석부대변인은 이날 김기배 사무총장 주재로 열린 당 3역 회의후 브리핑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사실 여부도 확인되지않은 `괴문건'에 대해 전혀 논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서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결코 용서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지에 실린 대권문건 실체에 대해 당내 어느 누구도 확인할 수 있는사람이 없다"면서 "과거 신한국당 선거대책본부에서도 이런 `괴문건'을 일절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당에서 만들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장 부대변인은 "따라서 `말'지는 이런 문건의 출처가 어디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문건을 입수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면서 "문건 내용을 갖고 과거 대선전 당의 입장이었다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 전용학 대변인은 고위당직자회의 브리핑에서 "경악을 금치못한다"면서 한나라당에 대해 문건과 관련한 진상공개를 요구했다.

전 대변인은 "신한국당이 언론을 채찍과 당근으로 끌어들이고 부장급 이상 간부나 정치부기자 등의 성향을 파악해 관리했다는 대선 문건이 보도된데 대해 경악을금치 못한다"면서 "당시 문건을 작성했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대부분 속해있는 한나라당에서 자신들이 과거 그같은 (언론)전략을 동원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나라당의 입장을 묻지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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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경영투명화


언론사 세무조사 공개해야


△ 지난 2월22일 낮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을 비롯한 언론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 국세청 앞에서 1994년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21@hani.co.kr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종반에 접어들면서 세무조사 공개 여부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언론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세무조사를 철저히 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 언론사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할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하지만 `언론권력'들은 여전히 언론탄압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정부 내부의 기류도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은 최근 현행 법상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국세청은 언론사에 세무조사를 하고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1994년 <조선일보> <한국방송> 등 10개 언론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아직까지 그 결과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당시 `바른언론을 위한 시민연합'이 국세청에 “언론사의 사회적 역할과 공적책임 등에 비추어 언론사의 경영관리에 관한 사항은 국민의 일반적 관심 앞에 공개돼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며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어 벌어진 행정소송에서도 서울고등법원은 국세청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킴으로 인한 공공의 이익만으로는 사생활의 비밀로서 조세비밀을 침해할 명백하고 우월한 공익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판결문의 취지였다.

이 소송이 끝나자 국세청은 국세기본법을 개정하면서 이른바 `비밀유지' 조항을 신설했다. 소송 과정에서 과세정보를 비밀로 유지한다는 명문화된 조항이 없어 일어났던 논란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던 진짜 속내는 지난 2월9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도쿄 발언으로 드러났다. “세무조사하면 가족관계까지 전부 조사하는 것 아니냐. (재산 등을) 가져서는 안될 사람도 (갖고) 있었다. 국세청이 원칙대로 했다면 상당히 징수해야 했다. 여러 건이 있었다. 그래서 없었다고 할 수는 없고 적당한 수준에서 얼마만 받고 끝내라고 딱 잘라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 이유에 대해 “만약 내가 공개했다면 큰일났을 것”이라며 “(언론사들) 존립에 대단히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막을 공개하면 존경심이 무너지고 국민들이 허탈해 할 것 같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이 언론사들의 이런 약점을 쥔 상태에서 세무조사 직후 언론사 사장들을 만나 “정직, 정확하게 써줬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이 사장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또 국세청의 문서보존 규정에 어긋나게 당시 깎아준 세금을 부과한 일부 문서 외에는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권언유착으로 서로의 비리를 감싸주고 서로 이익을 챙겨왔다는 강한 의혹을 불러오는 대목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시민 사회단체들은 이번 세무조사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문기구인 한국기독교 원로회의 등이 성명을 내 세무조사 결과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또 전국 162개 단체가 참여한 신문개혁국민행동은 세무조사가 끝나는 시점을 전후해 오는 5월 2일부터 국세청 앞에서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공개를 요구하는 집회와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여론도 공개를 지지하고 있다. <한겨레> 여론조사팀이 지난 2월 전국의 성인남녀 7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67.1%가 “전부 공개”, 26.2%는 “위법 내용 공개”를 요구했으며, “공개 반대” 의견은 3%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세무조사 결과 공개는 검찰 고발 때를 제외하고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김 대통령도 지난 3월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무조사 결과 공개 의향을 묻는 질문에 “여론조사에서 국민 90% 이상이 공표해야 한다고 나온 것에 정부는 곤혹스럽다. 법과 여론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만 답변했다.

국세기본법의 비밀유지 조항은 `세무공무원은 납세자가 세법이 정한 납세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제출한 자료나 국세의 부과 또는 징수를 목적으로 업무상 취득한 자료를 타인에게 제공 또는 누설하거나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가기관이 조세쟁송 또는 조세범의 소추목적을 위하여 과세정보를 요구하는 경우 등 몇가지 예외규정을 둬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주석 국세청 조사국장은 “국세청은 사법당국에 고발할 경우에만, 고발서 공개 시점에 맞춰 일부 기업의 혐의에 대해 설명해왔을 뿐”이라며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결과를 보고 그 공표 여부를 결정할 것이며, 사법당국에 고발할 사실이 있더라도 발표할 지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현행법상으로도 그 결과를 공개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세기본법의 비밀유지 조항은 권력이 과세정보를 남용하거나, 납세자의 정보를 누설해 사적인 이익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이므로 알 권리 차원에서의 공개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또 정치권에서는 법을 개정해서라도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이런 주장이 이번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며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당 의원들에게서 나오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은 지난 2월15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는 공기능을 가진 언론사나 정부투자기관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94년 실시했던 언론사 세무조사는 물론 지금 진행중인 세무조사 결과도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난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도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이 “어떤 정권이라도 세무조사 결과를 움켜쥐고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없도록 공개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국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국세기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는 의원들 개인의 입장이며, 한나라당은 공식적으로는 세무조사 결과 공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법과 관계없이 공개가 가능한 방법은 언론사들 스스로 공개하는 것이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지난 3월30일 성명을 내 “현행법상 국세청이 추징금 통보 내용을 공개하는 데 무리가 있다면, 언론사 스스로 발표해 국민 의혹을 풀고 투명한 언론사 운영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공개할 언론사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점에서 이는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한국기자협회가 지난 3월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세무조사 결과 자체 공개 의향을 조사한 결과 응답한 16개사 대부분이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언론계 안팎에서 `세무조사 결과 공개운동'을 준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권영준 사무차장은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권언유착 의혹이 또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고 언론길들이기라는 비판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인현 기자





인터뷰/ 참여연대 하승수 변호사


참여연대 실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승수(사진) 변호사는 “현행법 해석상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데 문제가 없으며,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시민단체 등의 정보공개 청구에 앞서 정부가 먼저 적극적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국민 대다수가 알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 언론사 세무조사를 놓고 언론탄압이냐, 정당한 국가권력 행사냐 논란이 벌어지는 등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있는데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공개돼야 한다. 94년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가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결국 밀실에서 은폐되고 축소되고 말았다. 바로 이런 것이 정치적 논란을 부른다. 이와 함께 권언유착 의혹을 벗고 권력과 언론의 건전한 긴장관계라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공개는 반드시 필요한 조처다.

―정부에서는 현행법상 고발할 때 외에는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인데?

=정부에서는 국세기본법의 비밀유지 조항을 얘기하는데, 이 조항은 국민들의 알 권리 차원의 공개 여부를 규정한 것이 아니다. 국가기관이 과세정보를 남용하거나, 세무공무원이 경쟁 기업 등에 납세자의 정보를 누설해 사적인 이익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다. 따라서 알 권리 차원에서의 공개는 다른 문제다. 정보공개법에는 개인정보를 비공개대상 정보로 인정하면서 `공개가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언론사의 납세실태가 어떤지, 언론사주와 일족의 재산축적 과정에서 `세금없는 부의 세습이 이뤄진 사실이 있는가' 등을 공개하는 것은 철저히 공익적 일이다. 설령 비밀유지 조항이 공개 여부를 규정한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공개가 제한되는 것은 세무공무원이 세무조사 과정에서 취득한 원자료일 뿐, 세무조사 결과를 정리한 서류를 공개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업의 영업상 비밀이나 개인의 사생활 등 보호돼야 할 부분도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현행 정보공개법은 이런 부분을 제외하고 부분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법인세를 탈루한 부분은 영업상 비밀로 보기 어렵고, 언론사주나 가족이 소득세나 증여세를 탈루한 부분도 언론의 공익성이라는 측면에서 `사생활'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 탈루행위 가운데 일부가 사생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과 공익상 공개할 필요성을 비교해 공개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김인현 기자

③판매시장 정상화


판매시장 정상화 위해 공동판매제 도입을


△ 지난 3월 초 “신문을 끊어달라”는 소 아무개(60·서울 동작구 상도5동)씨와 “1년은 봐야 한다”는 신문 수금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수금원이 소씨의 집 문손잡이를 부쉈다. 김봉규 기자bong9@hani.co.kr 
무가지·경품등 '출혈경쟁' 제동
판촉·물류비 줄여 이익증대 효과
소 아무개(60)씨는 지난해 2월 서울 동작구 상도5동으로 이사온 뒤부터 최근까지 `신문과의 전쟁'을 치러야했다. 문앞에 붙인 `사절' 표시가 무색하도록 ㄱ신문 지국은 6개월 동안 소씨의 집에 무가지를 배달했다. 지난해 8월께 지국장이 비누선물셋트를 들고 직접 찾아와 신문 구독을 간청하자, 결국 소씨는 ㄱ신문을 받아보기로 했다.

6개월만에 마음이 바뀐 소씨는 신문을 끊기로 했지만 지국에서는 계약상 1년을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소씨는 “그런 계약서를 본적도 없다”며 “신문이 이렇게 행패를 부릴 줄 몰랐다”고 말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와 한국기자협회가 지난해 12월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8.8%가 “신문 구독 강요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신문구독을 조건으로 경품을 받았다”고 답한 응답자는 31.5%였고, 14.9%는 “현재도 무료로 구독하는 신문이 있다”고 했다.

지국 약정서 '노비문서'


`신문전쟁', 신문 판촉과 배달을 전담하고 있는 각 지국은 그 최전방에 서도록 내몰리고 있다. 본사의 우월적 지위를 강조한 `약정서'가 지국을 옭아매고 있다. 지국장들은 이 약정서를 서슴없이 `노비문서'라 부른다.

ㄴ신문 한 지국을 운영중인 이아무개(42)씨는 한달에 3000여부를 본사에서 받는다. 본사가 정한 이씨가 `팔아야만 하는' 부수다. 하지만 실제로 이씨가 한달에 팔고 있는 신문은 1600부, 나머지 1400부는 무가지로 넣고 있다. 이씨는 “남는 신문을 버리다 걸리면 지국을 포기해야 하는 등 불이익이 돌아와 배달비용을 부담해 가며 무가지로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족벌신문 완강한 거부


이씨는 한달에 2200부, 한부당 4000여원씩 신문사에 납입하고 있다. 부당 납입단가는 지국마다 다르고 결정권은 신문사가 가진다.

“불공평한 줄은 알지만 그래도 지국을 유지한다는 게 어딥니까?” 이씨는 ㄴ신문 지국을 운영하기 전 6년6개월 동안 ㄷ신문 한 지국을 운영하다 본사가 갑작스레 부당 납입단가를 300원 올리고, 600부를 더 떠안긴 쓰라린 경험이 있다. 3천~6천원짜리 찻잔세트를 돌리며 부수 늘리기에 고심했지만 이씨는 결국 지국을 포기하고 말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최근 전국의 일간신문 지국장 527명을 면접조사한 `신문시장질서 정상화를 위한 신문판매 실태'를 보면, 일간지 지국은 본사로부터 받은 신문 부수 가운데 31.1%를 무료로 뿌려지거나 파지업자에게 넘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서 뒷받침 필요


신문 판매경쟁에서 본사의 `출혈'도 크다. 업계관계자들에 따르면, 본사가 지국으로부터 받는 부당 납입단가는 1천~4천500원 정도다. 하지만 2001년 4월 현재, 32면 신문 한부를 만든는 데 용지와 잉크 값만 한달에 3640여원이 든다. 여기에 지국까지 한부당 한달 배달 비용 350여원을 더하면 3990원이다. 결국 인건비 등까지 계산하면 찍어낼수록 손해인 셈이다.

신문사가 판매에 무리수를 두고 있는 이유는 신문 수입의 광고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한국 신문들의 광고수입 의존도가 80~90%를 넘어 선 것은 언론계 안팎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는 일본의 39%와, 프랑스의 47%, 영국의 60%(이상 95년 기준)와 비교해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이다. 더구나 한국의 광고주들은 광고단가를 판매부수와 직결시키는 관행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광고주가 합리적 광고정책을 세우는 데 기본이되는 신문판매부수조차 정확히 나와있지 않는 게 우리 신문시장의 현실이다. 신문부수공사(ABC)제도는 지국이 독자로부터 구독료를 받는 부수를 유료부수로 계산하는 것이다.

왜곡된 신문시장을 개선하는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신문공동판매제'를 제안하고 있다.

지국부수·납입금 본사 맘대로




△ 21일 낮 서울시내 한 자원재생업체 야적장에 비닐 포장도 채 뜯지 않은 신문 뭉치 등 6t 정도의 신문들이 `폐지'로 변해 산처럼 쌓여있다. 최근 경기침체로 제지공장에서 재생되는 양도 줄어, 버려진 신문들은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장철규 기자
신문공동판매제는 공동판매회사를 만든 뒤 원하는 신문사들의 지국을 합쳐 이 회사가 판촉과 배달을 총괄하도록 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 사무총장은 “이를 통해 비정상적인 판촉과 물류비용을 줄여 신문판매이익을 높일 수 있다”며 “신문사들은 추가 이익을 판촉경쟁이 아닌 신문의 질 향상에 쓰게돼 독자들이 알찬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고 독자의 신문선택권도 보장받게 된다”고 말했다. 또 “이른바 `마이너신문'이나 신생신문이 막대한 자본이 드는 판촉과 배달망을 갖추지 않더라도 공동 판매회사를 통해 구독자수가 적은 지역에서도 판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북대 김승수 교수(신문방송학)는 “신문공동판매회사 설립이 왜곡된 시장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의 활성화를 위한 정부 보조도 필요하다”며 “이 회사가 특정 자본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신문사는 물론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출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매시장을 정상화할 뿐만 아니라 독자선택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신문공동판매제에 대해 언론권력들은 논의 자체마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군사독재시절 확립한 전국적 판매조직망의 기득권 유지를 잃지 않으려는 속셈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신문사들은 신문공동판매제를 통해 실제 유료부수가 드러나 광고수익이 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공동판매제의 대안 또는 전단계로 지국의 판촉·배달기능 가운데 배달만 떼어내 공동배달회사에게 위탁하는 공동배달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세종대 허행량 교수(신문방송학)는 최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동배달제를 실시할 경우,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문사들의 판매 영업이익은 87% 정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경향신문><국민일보><대한매일><문화일보><세계일보><한겨레>는 최근 미디어경영연구소에 서울 강남 일부지역에서 공동배달제를 실시할 경우 비용과 수익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는 등 공동배달제의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

신문시장을 정상화하는 데는 정부의 몫도 크다. 최근 이른바 `족벌신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년6개월만에 △경품 포함 무가지 비율을 유가지의 20%안으로 제한 △7일 이상 강제 투입 규제 △지국당 차별적인 부당단가 할인 금지 등을 뼈대로 한 신문고시가 부활됐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신문공정판매총연합회 등은 “혼탁한 신문시장을 정상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판매정상화 방안인 신문고시에 대해서도 언론권력들은 사실관계까지 왜곡하며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한림대 정연구 교수(신문방송학)는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해 신문공동판매 외에도 △법인세법 개정을 통해 신문의 판매부대비용과 광고선전비의 한도 지정 △부가가치세법을 개정해 신문판매부문의 제반거래가 과세 신고대상이 되도록 지정 △소비자 보호법 시행령에 신문 사업에 대한 소비자 피해보상기구 설치 의무화 등을 주장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외국에선 어떻게

일 정부개입-업계자정 '시너지'…공정위, 경품·무가지 금지
프랑스 '공동배급제' 진입장벽 낮춰…정부·업계대표 판매감시
신문 판매시장의 정상화는 제도적 정비와 신문업계의 자율적인 정화 노력이 함께할 때 이뤄질 수 있다. 일본과 프랑스의 판매 시장을 살펴봤다.

◇일본=일본 정부와 신문 업계가 함께 신문고시와 자율 규약을 바탕으로 신문 시장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80년대 중반부터 신문판매 질서가 자리잡게 됐다.

경품과 무가지가 살포 등 과잉경쟁에 따른 폐해가 심해지자 일본 신문협회는 1954년 12월 △독자의 구매 자유 존중 △경품 금지 등을 뼈대로 한 `신문판매강령'을 만들었지만, 시장을 바로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공정취인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는 1955년 12월 독점금지법을 적용해 `신문업에 있어서 특정한 불공정 거래 방법 고시'을 제정하고 경품, 무가지 살포, 정가 할인 등을 금지했다. 이어 1964년에는 이 고시에서 경품제공과 무가지 배포 등 두 항목을 떼어내 `신문업에 있어 경품류의 제공에 관한 사항의 제한고시'를 만들었고, 신문업계는 `신문공정경쟁규약'등 자율규약을 강화했다.

1992년 7월부터는 통산성이 방문판매법 시행령을 개정해 신문의 방문판촉활동을 규제하자, 6개 주요신문들은 판촉경쟁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신문판매근대화센터'를 설치했다.

한편, 일본의 신문판매제는 1941년 신문통제에 따라 공동판매제가 실시되다가 1951년부터 신문사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신문사별로 지국을 운영하는 `전매제'로 돌아섰다. 하지만 최근 배달인력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중·소도시에서 공동판매제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프랑스=우리나라와는 달리 가판이 신문 판매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1947년 4월 모든 출판물이 동등한 배급조건 아래 경쟁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셰법'은 프랑스 신문 판매 제도의 바탕이 되고 있다.
비셰법에 따라 설립된 공동배급회사로는 파리지역 840개 언론사가 주주이자 주요 고객인 파리정기간행물신배급회사(NMPP), 리옹정기간행물신배급회사 등이 있다. 특히 파리정기간행물신배급회사는 1998년에 2900여종의 인쇄물(일간지 26개)을 3만2천여개의 점포에 배급하는 등 프랑스 정기간행물 배급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또 정부 대표, 신문관련전문직 종사자, 배급연합사 대표 등으로 구성된 `인쇄매체배급최고평의회'가 비셰법 제17조에 따라 만들어져 배급사의 재정과 판매소의 활동을 감시하고 운송수단의 활용을 보장하고 있다. 공동배급회사가 파업하면 신문배포 자체가 어려워지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공동배급제는 새로운 신문이 배급망 확충을 위해 막대한 자본을 들이지 않고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하는 등 `정보의 다원주의' 유지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는 신문의 경품증정 판매는 형사처벌 하는 등 시장질서 확립을 위한 법적 규제도 두고 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