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40년 뒤 당신들이 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자식들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라는
청암의 당부를 잊지 말라
어제(21일)는 청암 송건호 선생이 신군부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생활 끝에 영면한 지 10주년이다. 일생을 독립언론과 현대사 연구에 바치고 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고인은 우리 시대 언론인·지식인의 사표였다.청암은 1999년 <기자협회보>가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장지연과 함께 선정되었다. 장지연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 훈장이 치탈되면서 유일한 ‘21세기 최고 언론인’이다. 그는 “나는 글을 쓸 때마다 30년, 40년 후에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생각한다. 크게는 민족을 위해, 작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는 자세로 글을 썼다.
청암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붓 한자루로 맞선 참 언론인이었다. 30대 초반부터 역사의 맥을 관통하고 불의와 비정을 고발하는 칼럼과 사설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언론인들이 독재에 부역하면서 온갖 악덕을 자행할 때 독재정권의 포섭 대상 영순위였지만 감투나 재물을 헌신짝 보듯 했다. 요임금이 벼슬을 주겠다고 권유하자 허유가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는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 그대로였다.
청암은 상식적인 지식인이었다. 몰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식대로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식에 어긋나는 독재와 싸웠고 상식에 어긋나게 기자들을 내쫓는 사주와 싸웠다. 달콤한 회유에도, 살벌한 협박에도 상식을 지키고자 했다. 상식을 접어두면 고관이 되고 신문사 편집국장 자리를 지킬 수 있는데도 눈앞의 이익보다 역사를 의식하며 고된 상식인의 길을 걸었다.
청암은 대단히 겸손하고 술 한잔도 할 줄 모르는 덤덤한 인물이지만 의기가 높고 용기도 있어서 6남매를 둔 가장이면서도 직장에 사표를 던질 줄 알았고 유신·5공의 광기에 맞섰다. 결이 고운 성품이어서 누구에게 독한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붓을 들면 불의한 자들이 식은땀을 흘리게 시비곡직을 가렸다. 매천 황현과 단재 신채호에 닿는 역사의 맥이다.
청암은 언론계에서 쫓겨나고 독재정권은 대학 강의도, 심지어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도 막았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사 연구에 팔을 걷었다. 그때까지 현대사는 황무지였다. 친일세력의 발호로 일제강점기와 해방후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어려웠다. 친일 잔재가 정치권력, 대학, 언론, 사법, 검찰, 재계에 포진하고 있어서 파헤치기가 쉽지 않았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근현대 연구가들이 하나같이 고중세사 연구가로 탈바꿈한 한국판이었다.
역사학계의 ‘직무유기’를 청암이 대신 해냈다. <한국현대인물사론>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언론사> 등 주옥같은 저서가 그것이다. ‘20세기 최고 언론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현대사 연구가’란 호칭도 손색이 없다. 그는 책상머리의 연구가는 아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장악에 나서려 하자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하고 선언문을 썼다가 5·17 뒤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죽음에 이르게 한 파킨슨증후군은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이다.
6월항쟁이 있기까지는 청암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를 만들고 <말>지를 발행하면서 재야언론인으로서 5공 비리와 폭압을 폭로하며 시민항쟁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겨레> 창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청암 선생 가신 지 10주년, 오늘의 언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쭈빗거리던 친일세력이 이제는 대놓고 식민지근대화론을 내걸고, 반통일 노선으로 일관해온 족벌신문은 이명박 정권과 유착하여 종편이라는 날개까지 달고 부패권력을 옹호한다.
송건호 선생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서울농대생 김상진군 자결 소식을 1단짜리 기사라도 싣게 했다가 권력·사주와 부딪치고, 자유언론의 물꼬를 텄다. 언론인들에게 당부한다. 30년, 40년 뒤 당신들이 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라는 청암의 당부를 잊지 말라고.
김삼웅 <송건호 평전> 저자·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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