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신문들은 이제껏 스스로 민족지다 정론지다 외쳐왔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오르면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오욕과 굴종으로 얼룩진 한국 신문 100년의 진실을 이들의 주장과 비교한다. 편집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때에도 야비한 수법인 세무사찰을 받았다.”
지난 3월 6일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이 창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하며 한 말이다. 이 짧은 말에는 현재 국세청 세무조사에 대한 강력한 불만과 조선일보가 민족지였다는 주장이 함축돼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친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늘 격렬하게 받아치곤 했다.
“김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친일 논쟁이 에스컬레이트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1985년 4월 조선일보가 지면으로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공개편지 중 일부다. 당시 `민족지-친일지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동아일보가 그해 4월 1일 창간 65돌 기념으로 사회면 머리에 조용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 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탄생과정을 밝히면서 조선일보를“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동아일보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으로 묘사했다.
이 기사가 나간 지 보름 뒤인 4월 14일 조선일보는 선우휘 당시 논설고문의 이름을 단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로 지상 반격을 가했다. 선우휘 고문은 이 글에서 김성열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향해 직설적으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며 싸움을 중지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조선일보 공격을 멈추지 않자, 조선일보도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의 초대사장”이었다며 이번 기회에 “친일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 논쟁이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자 서둘러 수습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조선일보는 창간 81돌을 맞아 지난 2~7일 5회에 걸쳐 쓴 `조선일보 사장 열전', 8~19일 8회에 걸쳐 쓴 `명기사 명사설'을 통해 조선일보의 일제하 행적을 `반일'에 맞춰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특집에서 그들의 다른 면, `항일'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길고 진한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리고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를 외눈이 아닌 두눈으로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지워 없앤 친일역사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실은 조선일보가 일제강점기에 썼던 기사와 논설에 그대로 남아 활자로 보관돼 있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바,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한 은(恩)과 광대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봉건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1939년 4월 29일치 사설에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쓴 생일축하문이다. 스스로를 낮추는 어미 `옵'자를 남발하며 비굴하게 몸을 굽힌 이 글은 신문의 사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극심한 `일왕 찬가'다.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하고,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라 하며, `충성'도 양에 차지 않은 듯 `극충극성'(克忠克誠)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이라고까지 부르는 이 사설이 `민족지' 조선일보에 버젓이 게재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 기사·사설은 일제 말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1920년대 4차례 정간조처를 당하고,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언론인이 축출된 뒤 조선일보의 필봉은 무디어지고 꺾여나갔다.
1932년 1월 8일 발생한 `폭탄 테러'를 조선일보는 호외로 보도한 데 이어 10일치 1면 머리로 이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행행으로부터 환행하시는 어료차(천황의 마차)에, 노부(천황의 행렬)가 앵전 문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경위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료차에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
이 기사는 “천황 폐하 환행도중/노부에 돌연 폭탄을 투척/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어료차 별무이상'이란 제목으로 보도됐으며, 기사 말미에 “범인은 …조선 경성생 이봉창(32)”이라고 썼다. 국내외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제의 편에 서서 이 의사를 `범인'이라고 딱지붙인 것이다. 1932년께에 이미 조선일보는 친일 노릇을 마다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을 항일투쟁사건으로 규정해 특종 보도한 것은 우리의 `민족지'들이 아니라 중국의 <국민신보>였다.
1933년 계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조선일보의 친일보도는 그 도를 한층 더해간다. 이런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7년 1월1일치 1면이다. 이날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1면에 총독의 새해기념사와 휘호를 실어 지면 변화의 획을 그었다. 조선일보는 이후 해마다 1월1일치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이에 앞서 조선일보는 1936년 12월 13일치 사설(`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운용을 잘못하면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항일 독립투쟁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이 악법에 대해 조선일보는 법령의 본질을 덮어둔 채 그 사회적 의의를 강조하면서 그 운용의 묘만을 거론한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조선일보는 마침내 일본군을 `아군' 혹은 `황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1937년 7월 19일).
8월 2일에는 사설(`총후(후방)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이 목적')에서 “제국 신민으로서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는 것”이 후원연맹의 중요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요는 국민 각 개인은 각각 힘자라는 데까지를 목표로 하고 응분의 성의를 다하는 데 있을 것이다. 있는 이는 있는 이대로 기만원을 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요, 출정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전선이 확대돼 전쟁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8월 12일 아예 조선동포들에게 국방헌금을 내도록 독려하는 `사고'를 낸다. 이 사고는 신문사와 사원들의 헌금 솔선을 밝히면서 “북지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고 돼 있으며 이후 고정란으로 실린다. 헌금이란 이름의 재산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일보 37년 12월 12일치는 “황군의 신속한 행동으로 단번에 지나 수도 남경을 무찌르게 됐다는 전선뉴스가 보도된 지 불과 수일에 이제 최후의 공성으로 단말마적 저항을 계속하던 남경성도 10일 밤으로 완전 함락을 보게 됐다”며 30만명을 학살한 일본군의 난징 공략을 우리의 승리인 양 축하하고 있다.
38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함께 미나미 지로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를 미화하는 특집기사를 싣는다.
“그 다음에 미나미 총독의 새 표어로 제창된 것이 내선일체이다. 일선동화도 내선융화도 옛말로 돌린 내선일여에서 내선일체로 재전환한 것이다”
신문 제호를 가려 놓으면 어느것이 `민족지'이고 어느것이 총독부 기관지인지 구분키 어려울 정도로 논조가 친일로 치달은 것이다.
이해 4월 일제는 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만들어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시작했다. 38년 6월 15일 조선일보는 육군지원병훈련소의 개소를 맞아 사설과 1면 머릿기사로 “조선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라 묘사하며 황국신민된 감격에 넘쳐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중국침략 1돌을 맞은 38년 7월 7일 조선일보는 이를 기념하여 사설·머릿기사 등 전 지면을 동원해 “열철일타의 일본혼이 총후국민의 의력과 같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의 발단을 만든 국민감격의 기념일인 7월 7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의 도시 농산 어촌에 들끓는 총후 황국신민의 …물적 심적 총동원의 체제는 귀한 호국의 영령에 바치는 조의와 출정 장병의 신고를 생각케 하는 뜻깊은 여러가지 행사”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폐간 4개월 전인 40년 4월 조선일보는 일왕 생일을 맞아 이제껏 신민(臣民)이라고 하던 조선 백성을 신자(臣子)로 불렀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 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 …억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새 지나 국민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아름다운 탄신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
그리하여 조선 백성은 일거에 일왕의 자식이 돼 버렸다.
이처럼 극한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40년 8월 11일 조선일보는 폐간된다. 폐간과 관련해 <조선일보 80년사> 발간사에서 방상훈 사장은 “민족지들이 친일을 했다면 일제가 왜 폐간을 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작지 않은 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는 폐간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방응모는 1935년 창간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을 본격적인 친일 잡지로 개편해 총독부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것은 40년 11월 창간 5돌을 맞아 “이 역사적 대변혁기에 그때 그때 본지에 허여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해왔다”고 자평하면서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일신시키는 데 일단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힌 데서도 확인된다.
조광이 말하는 `미력'과 `일단의 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자. 조광 40년 3월호는 “일본제국과 천황에게―성은 속에 만복적 희열을 느끼며”라는 제하의 권두언을 내보내고 이어 7월호에서는 “만세 일계의 황통을 이으옵신 세계 무비의 깨끗하옵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이처럼 날로 점앙하는 것은 위로 성명(聖明)하옵신 천황폐하를 모시옵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해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조선통치 30년을 기념하면서 “지금부터 만 30년 전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병화를 위해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했다고 경술국치를 왜곡했다. 또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고 무단통치의 장본인을 찬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7명의 총독이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건설을 결실시켰다”고 떠받들고, 나아가 “중대 시기인 이때를 당하여 2300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의 실(實)을 거하여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안 될 것”이라고 친일매국을 독려했다.
41년 신년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헌사로 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다. “서기 넘치는 신년을 맞이하여 천황 폐하, 황후 폐하의 성수무강하옵시기를 충심으로 비옵는 동시에 황태자 전하, 의궁 전하, 희궁 효궁 순궁 천궁 사내친왕 전하께옵서도 어건강하옵시기 삼가 비는 바입니다.”
이어 2월호 사설에서는 `쌀을 갖다 바칠 것'을 독려하고 나섰다.
“내 손으로 지은 쌀을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제라면 내 손으로 지은 쌀, 내 자본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들어 나라에 바치고, 그 처분을 바라는 것이 신체제요, 총력 운동이요, 또 신절을 다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이 사설이 나갈 즈음 일제의 조선 곡물 수탈은 한층 도를 더한다. 1941년 쌀 수확량의 43.1%였던 일제의 수탈률은 1944년에 이르면 63.8%까지 올라간다. 먹을 것이 없는 조선의 민중은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조광> 친일 기사·논설은 끝이 없다. `해군특별병 지원제도의 광영'(43년 6월호)에 감격하고 징병제 실시에 감사드리다가(43년 8월호), 44년 8월호에서는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36%)이 “대만의 일본어 해독자 6할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진 것”이라고 개탄하면서 `일본 정신 체득을 위해서 국어(일본어)가 각 가정에까지 침투되도록 전사회적으로 일대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라고 외치고 나섰다.
그런데도 <월간조선>은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월간조선이 “일제치하 조선의 광명으로서 겨레의 어둠을 밝혔던 조광”의 후신이라고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7월11일치 사설에서 조선일보를 반통일신문이라고 비판하는 국내외의 주장을 반박하며 “조선일보는 어떤 협박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그들의 친일은 길들여진 결과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단 말일 것이다.
특별취재팀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71934116.html
[언론권력] 1939년 4월29일 1면 사설 전문
<조선일보>가 1939년 4월29일 1면 머리로 실은(사진) 대표적 친일사설 `봉축 천장절' 전문을 소개한다. 한자와 옛 문체로 된 것을 요즘 말로 옮겼다. 히틀러를 찬양한 머릿기사가 눈길을 끈다 편집자
봄바람이 화창하고 온갖 꽃이 흐드러진 이때에 다시 `천장절'을 맞아 억만 신하와 서민은 경축하는 마음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이다. 성상폐하께옵서 옥체 강녕하시다는 말씀 우러러 받드옵는 바 실로 다같이 황공하옵고 축하할 바이다. 해마다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크나큰 은혜와 어짊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나랏일을 하고, 충성과 의리를 다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마침 중국사변(중일전쟁) 제3년의 오랜 파괴와 건설이 병행하는 중에 있어 지극히 높은 임(지존·천황)의 하루 일을 우러러 받들면, 만가지 정무를 다스리옵심은 물론, 중대한 군무에까지도 마음을 쓰시옵는다는데, 이는 바로 제1전선의 빛나는 무훈에다 나라 위세가 높이 드날림으로 나타나도다. 이것이 임(천황)의 위세로부터 나온 것임을 되새기면 실로 황공무지하여 감격을 이기지 못할 바이다. 신민 두루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오래오래 사실 것을 축하하옵는 동시에 만백성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충성으로 위로 성스러운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여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의 나라 일본의 위광을 한층 더 온 세상에 빛나게 하는 길이요, 또 신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이날을 맞아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광영을 봉축하면서 끝으로 우리가 행복스러워하는 까닭임을 강조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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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어린영혼까지 물들인 '소년조선'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하루 앞둔 1939년(소화 15년) 4월28일치 <소년조선일보> 2면의 일왕비 찬양 기사(◀사진). <조선일보>는 어른들이 보는 신문으로도 모자라 어린이들의 신문에까지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실어 조선의 어린 정신들을 더럽혔다. 다음은 이 기사의 전문이다.
`황후 폐하께옵서 상병에게 화초를 어하사'
황후 폐하께옵서는 출전해서 다치고 온 부상병을 염려하옵시고 그들에게 황송하옵게도 신숙어원(新宿御苑)에서 기르옵신 화초씨를 내리셨습니다. 씨앗은 나팔꽃 공작꽃 같은 것 외에 마흔몇 가지이고 또 `달리아' 같은 구근(球根)도 십여종이라 합니다. 어(御·단어의 뜻을 높이기 위한 접두어) 인자하심에 감격해서 삼도군사보호원 부총재(三島軍事保護院 副總裁)는 지난 십구일에 참내 씨앗과 구근을 배수하고 각 요양소에 광영을 분배하였다 합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719415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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