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박정희 정권과 밀월

[언론권력] 조·중·동 유신체제 앞다퉈 찬양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앞둔 1967년 당시 신문사들은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18%의 낮은 금리를 적용받았다. 신문 용지에 대해서도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이 적용됐으며, 저리의 차관 대출 특혜까지 누리고 있었다. 일반 사기업에선 엄두도 못낼 혜택이자, 독재정권이 신문들에 베푼 `당근'이었던 셈이다.



<조선일보>는 신문사 사옥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67년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상업차관으로 4천만달러를 들여왔다. 경제개발 초기인 당시 도입 자체가 특혜인 차관을 관광호텔 건립에 배정하는 것에 경제기획원 실무 담당과장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리아나호텔 상업차관은 외자도입 허가 서류에 실무 담당과장의 서명 없이 허가가 난 전무후무한 사례로 알려졌다.


당시 조선일보 방우영 발행인(현 회장)은 68년 3월15일치 <기자협회보> 인터뷰에서 코리아나호텔이 완성될 예정인 70년을 “조선일보 비약의 해”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비약의 해'를 앞두고 3선 개헌이 있었고, 조선일보는 이를 본격 옹호하기 시작했다.


69년 10월17일 박정희 군사정권은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이어 투표율 77.1%에 3분의 2가 조금 넘는 찬성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투표를 하루 앞두고 조선일보는 “`영광의 후퇴'보다 `전진의 십자가'를, `나는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번 더”라는 낯뜨거운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여기서 11명의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 한국'이란 제목으로 “건설 중단은 혼란만 초래” “안보 위해 정치적 안정을” “정국의 안정이 제일조건” “대외적으론 국위선양” “훌륭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등으로 보도했다.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노골적인 부추김이다.


국민투표가 끝난 뒤인 19일엔 사설 `국민의 심판은 끝났다―다수결에의 복종과 함께 소수파도 존중'에서 “비록 치열한 반대세력이었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의 원칙대로 이제는 다수결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헌 과정의 잘잘못을 가리기는커녕 아예 논쟁을 덮자고 한 것이다.


3선 개헌이 이뤄짐에 따라 71년 4월27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24일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조선일보를 찾았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가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폭로한 것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방우영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후락은) 환담중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채 주필이 `3선만 하고는 더이상은 안 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이번만 하고는 다시는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약 3선으로 그쳤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딱 한번만 더'라는 묘수까지 가르쳐 줬던 조선일보는 유신을 찬양했다. 그것도 정권의 압력에 못 이기는 척도 아니고 드러내놓고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국민의 의표를 찌르는” 유신 발표 다음날인 72년 10월18일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란 사설에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한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한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 “비상 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썼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정치체제 개혁'을 통해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 …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라며 “우리는 박 대통령이 비상한 결의를 갖고 대담한 체제개혁 행동을 취하게 된 충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고 적었다. “국민은 경거망동을 삼가하고 일체 혼란의 발생을 자진해서 억제토록 해야 할 것”이라고도 썼다. 유신 조처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비상계엄 선포의 의의'란 사설을 통해 다른 신문보다는 조금 완곡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유신에 대해 “평화지향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이라고 썼다.


조선일보의 찬양은 계속된다. 10월28일 사설 `유신적 개혁의 기초―민주주의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헌법'은 “발의측의 문제의식이 이렇듯 왕성하고 과감한 개혁이 담긴 개혁안을 우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체육관 선거'의 토대를 닦았던 대통령 직선제 폐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에 대해선 “대통령을 직접 선거함으로써 빚어졌던 여러 가지 폐해와 부작용을 일소할 수 있게 된다”고 썼다. 대통령이 전제군주의 권한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알맞게 강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일보> 역시 같은 날 고딕체로 강조한 사설 `국가의 안태를 바라는 뇌리에―왜 지금 헌법을 고쳐야 하는가, 왜 강력한 대통령이 필요한가'에서 유신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박두하는 선거의 견제를 받는 대통령이 민족 역사상의 최대과업을 완수하기에는 너무 짐이 무겁다고 본다. … 선거로 시작되어 선거로 끝나는 대통령으로서는 침착하게 자기 경륜을 펼 사이가 없다”는 것이다.


계엄령 아래에서 반대운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치러진 유신헌법 국민투표에 대해 조선일보는 11월23일치 `새 역사의 출발'이란 사설을 내보냈다.


“그 어느때보다 압도적인 지지와 찬성을 나타냈다. …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박정희씨를 단독후보로 뽑은 것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에 합당한 후보인물을 추천하는 절차를 다 한 것으로 알고 있다”(72년 12월23일치)고 주장했다.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는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 우리는 더욱 전망적인 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국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탁월한 영도자를 가졌다”(12월28일치 사설)라고 거듭 찬양했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와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최대과업의 완수.' 그것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당시 신문들이 유신을 찬양하며 대통령에 전제군주의 힘을 몰아주자고 외친 논리였다. “아시아의 질서는 미일의 중공 접근 내지 수교로 안정체제의 균형이 깨어질 것으로 판단 … 이 중대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자위적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게 조선일보의 주장(10월28일치 사설)이었다. 냉전체제에 찾아온 해빙 분위기를 독재 옹호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지금의 상황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정착, 나아가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에 맞닥뜨려 있다. 하지만 언론권력은 남북관계 개선이 막상 현실화하는 요즈음 오히려 이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신 찬양을 비롯해 74년 1월8일 `유신 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거나 헌법 개폐를 주장·발의·제안·청원을 할 경우 영장없이 구속하고 15년 이하의 징역을 살리고 비상군법재판에서 처단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됐을 때도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침묵을 지켰다. <경향신문>도 같은해 1월10일 사설 `시련 극복을 위한 집약치의 단단―박 대통령의 긴급조치 선포의 의의'에서 “우리는 박 대통령의 이같은 긴급조치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조치 선포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88년 <한국일보>는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한 집단의 순위'에 대한 여론조사(8월17일치)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학생 42.2%, 야당 19.9%, 재야 11%, 여당 10.8%였다. 신문을 비롯해 언론이 민주화에 공헌했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6/2001/009100006200104041852001.html


[언론권력] 국제언론기관 이용 시절따라 입맛따라 

`자기 입맛에 맞게 국제 언론단체 이용하기'

1999년 10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사 사장의 탈세·구속 사건 이후 현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국내 신문들이 툭하면 국제 언론단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돼 버렸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며 국내 신문들을 통제하던 67년 4월 국내 신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해괴한' 모습을 보였다.


제6대 대통령 선거일(67년 5월3일)을 앞두고 4월7일 신문의 날을 맞아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기관에 상주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민당은 국제언론인협회(IPI)와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에 `한국 정부의 언론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등에 격려문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신문들은 일제히 신민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4월7일치 `신민당에 충고한다-언론의 권위를 선거에 이용 말라'란 사설에서 `언론단체에 관한 모욕적 표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같은날 <중앙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한국 언론의 자주성을 얕보고 언론을 병신 취급하지 말라”고 공격했다. <한국일보>도 `신민당은 언론 불신을 조장 말라'란 사설에서 `국제언론인협회나 통일부흥위원단에 소명서를 제출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꾸짖었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기관에 상주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신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터무니 없는 악선전'이라고 잡아뗐고,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는 언급을 회피했다.


정부 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 등 정권의 압력을 막기 위해 나선 신민당을 오히려 공격한 것이다. 국제 단체에 국내 언론 문제를 가져가는 것 역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은 그나마 봐줄 만하다. 최근 보여온 `사대주의적 모습'과는 그나마 다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홍석현 사장이 탈세·구속 사건이 벌어진 99년 10월 홍 사장이 부회장으로 있던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사건을 국제언론인협회 본부에 보고했으며, 조선일보 역시 2000년 2월 도·감청 문제에 관한 사설이 검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1억8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이 사건을 직접 보고한 것으로 언론계에 알려져 있다. 그 뒤 국제언론인협회는 홍 사장 구속은 `언론탄압'이라는 식의 중앙일보 주장, 손해배상 판결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그대로 중계하는 내용의 편지를 한국 정부에 보내온 바 있다.


신민당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이 해괴한 반응을 보이고 나흘 뒤인 67년 4월11일 <동아일보>는 그나마 이성적인 사설을 실었는데, “상주란 생각할 수 없으나 빈번히 출입하는 것은 사실이오”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이렇게 덧붙인다.


“국제기구에 언론 문제를 언론과 상의 없이 먼저 제기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6/2001/009100006200104042110065.html


[언론권력] 5·16 쿠데타 정당화 앞장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인 5월19일 군사정권은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는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그 발행인인 조용수 사장을 `용공'으로 몰아 구속했다. 국내·외 문단 및 언론계 인사 104명, 일본 펜클럽 등의 탄원에도 아랑곳없이 같은해 12월22일 조씨를 처형했다.

23일엔 전국 언론사 916개 가운데 일간지 39개(중앙일간지 15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 남기고 모두 폐간했다.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폐간 직후인 5월26일 <동아일보>는 쿠데타와 직후 벌어진 일련의 조처들을 정당화한다.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라는 사설에서 “5·16 군사혁명이 민주적이냐 또는 합헌이냐 혹은 지휘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의 논의는 이미 기정사실화한 이 혁명을 반공, 민주건설을 향해 이끌고 나가야 할 이 단계에 있어서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보다 한발 앞서 민족일보가 폐간되던 5월19일 `제2단계에로 돌입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하여'(사진)란 사설에서 “군사혁명은 …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군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고 썼다. “확실히 없었던 것만 못한 불행한 사태”(5월16일치 사설) 또는 “법질서에 의하지 않은 이러한 사태가 민주주의의 본도가 아니라는 것”(5월17일치 사설) 등과 같은 주장에서 확 돌아선 것이다.


조선과 동아는 이후 65년 창간된 <중앙일보>와 함께 3선 개헌과 유신의 나팔수 노릇을 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6/2001/0091000062001040421142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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