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재벌신문의 태생적 한계

[언론권력]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 언론계에는 소비재 수출 주도형 경제개발과 이에 따른 광고시장 확대, 신문사간 경쟁 격화를 배경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민족적 친일 곡필로 얼룩진 언론사에 또 다른 곡필의 흐름이 가세한다. 삼성이 창간한 신문 <중앙일보>가 소속 재벌의 치부를 적극 감싸고 돈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국내 첫 `재벌신문'인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됐다. 중앙은 정치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병철씨가 그 대신에 만든 것이다. 1986년에 출판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전기 <호암자전>은 중앙의 창간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기업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해 정부운영과 국가방위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됐다. 이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려는 듯, 창간과 함께 중앙은 삼성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물량공세를 폈다. 무가지를 총 발행부수의 27%까지 늘리고 1967년 당시 국내 초고속 윤전기 8대 가운데 5대를 보유하는 자본력을 뽐냈다. 설립 뒤 5년간의 적자를 내면서도 판매 경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삼성의 자본력이었다.


재벌신문의 폐해에 대한 우려는 채 1년도 못돼 현실로 드러났다. 66년 5월24일 벌어진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부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원을 부과했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국내 굴지의 재벌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던 터였다.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은 중앙이란 재벌언론이 `밀수'를 옹호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밀수가 얼마나 으뜸가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는지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밀수, 그것은 곧 망국이다.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흉악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럽고 끔찍스러운 범죄 …또한 5·16 이후 이 망국행위를 근절키 위해 특별입법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어떤 밀수항목에게는 사형을 언도한 일까지 있다.”(동아 66년 9월16일 사설 `삼성재벌의 밀수')


같은해 9월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이 밀수사건이 세상에 폭로되자, 중앙은 삼성쪽 해명 논리를 연일 지면을 통해 쏟아부었다.


9월16일치 3면에 `사카린 밀수보도/ 사실과 다르다'는 제목 아래 `직원 개인의 비행이다, 기재 도입에 부당삽입, 즉각 적발 자진신고 했다, 이미 5월에 의법조치' `불미한 행위 회사선 몰랐다'라고 보도했다. 다음날에도 7면에서 당시 부산세관장의 말을 빌려 “정당절차 따라 처벌했다, 밀수품 아니며 내 책임하에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같은날 사설 `기업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도 “이번의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도 정확한 경위가 이미 관계 기관에 의해 발표됐거니와 왜곡되거나 무분별한 흠이 없지 않은 세론이 비생산적이고 인심을 쓸모없이 자극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썼다.


급기야 당시 삼성이 거느리고 있던 동양텔레비전·라디오 등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에 나섰다. 텔레비전의 경우 9월18일 오전 9시30분 교양프로그램 <일요응접실>에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석초씨, 서울대 김기두 교수 등을 출연시켜 비호 방송을 내보냈고, 같은날 저녁 7시 <석양 속의 데이트>에서도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승한씨 등이 나와 삼성을 옹호했다. 동양라디오도 17, 18, 19일에 아침 저녁으로 삼성을 감싸고 돌았다.


이런 보도는 `대재벌이 밀수를 했다-특혜밀수의 정치파장' `국민 분노케 한 파렴치'(동아 9월17일치) 등 다른 신문들 보도나 진상 규명 요구 등 들끓었던 여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중앙의 삼성 옹호는 계속된다.


`벌과금은 한비와 무관'(9월19일치 1면).
`양벌죄 적용 불가 재수사 필요없다/ 한국비료는 관계없고 부산세관 처분도 적법”(9월19일치 7면).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에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9월19일치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


“정계 한 소식통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에 대해 한 재벌을 치기 위해 벌이는 하나의 정치적 장난에 불과하다고 하나의 주석을 붙였다. 그는 그 이유로 한국의 대재벌이 불과 2천만원짜리 밀수를 할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며 앞으로 국회에서 조사단이 구성되면 그때 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파헤쳐 이런 장난을 치는 못된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고 일갈.”(9월19일치 2면)


중앙은 온 국민이 분노하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 규명을 제쳐놓았다. 되레 날마다 지면을 통해 삼성 직원 몇명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불과하고 그에 따른 처벌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수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삼성쪽 주장을 그대로 싣는 `사보' 구실을 했다.


삼성 감싸기 보도가 언론계와 독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자 박정희 대통령이 9월21일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는 편집권 침해 가능성 등 일부 한계가 있었지만 △경영과 편집의 분리 △신문과 방송의 겸업 금지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언론의 공익성 보장을 위한 법률안' 제출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이번 삼성 사건을 보고 재벌이 언론을 독점해 사물시하는 폐단을 막을 필요성이 있다. 재벌과 언론기관의 완전분리, 특정인에 의한 언론기관의 독점소유 배제를 위한 법적 조치를 연구하라.”


대통령까지 나서자 버티던 이병철 당시 한국비료 사장은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언론과 학원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다짐했다. 대검찰청은 9월24일 이병철 사장의 차남인 한국비료 이창희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6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마무리지었다.


이에 대해 신문들은 `국민 기만한 각본수사 이병철씨 무혐의는 모순당착'(동아 10월7일치 3면)이라 비판하고, 사카린 밀수는 빙산의 일각이고 건설자재란 명목으로 세탁기, 양변기, 전화기, 텔레비전도 밀수했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27년이 흐른 93년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초대 사장 전기인 <유민 홍진기 전기>에는 여전히 이렇게 적혀 있다.


“중앙일보는 창간 1년이 못돼 기존 신문 중 최대 발행부수를 지키고 있던 타지를 1만부 앞설 수 있었다. 이것은 경쟁사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경쟁회사들의 견제가 시작된 것은 창간 1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마침 `한비' 사건이 발생하자 경쟁사들은 중앙일보에 포화를 집중했다. 한비 사건은 건설 중이던 비료공장에서 원료로 들어온 사카린 일부가 유출된 사건이다. 이것은 초기에 발견되어 당국의 사법적 조치가 있었고 회사로서도 관계자들을 문책했다. 그런데 몇몇 신문들이 이 사건을 다시 들춰 정치문제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같은해 나온 한권의 책은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을 보여준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병철 삼성회장의 맏아들 맹희씨가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맹희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65년 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을 요즘으로 치면 2000억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냉장고·에어컨·전화기·스테인레스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특별취재반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21902088.html


[언론권력] 삼성 경쟁자엔 예리한 칼날

삼성을 비호하는 `재벌언론' <중앙일보>의 폐해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에만 그치지 않았다.




사카린 밀수사건이 있고 3년이 지난 1969년 4월3일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방송사건'이 터진다. `미풍' 조미료 제조회사인 삼성 계열의 제일제당과 `미원' 조미료 제조회사인 미원주식회사가 조미료의 원료인 아노신산 소다를 일본으로부터 불법적으로 몰래 들여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삼성 계열사인 <동양방송>은 4월4일 밤 10시 뉴스에서 조미료 밀수사건을 보도하며 미원이 조미료 밀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을 부풀리고 제일제당의 조미료 밀수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미원이 광고를 후원하던 프로그램에 더이상 광고를 내지 못하게 했으며, 중앙일보는 밀수사건에 대한 미원의 해명광고를 싣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결국 미원은 4월5일 <동아일보> 2면에 동양방송의 불공정 보도와 중앙의 해명광고 게재 거부에 함의하는 의견광고를 실었다.


현대그룹은 1980년 언론을 갖고 있지 않은 자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았다. 1980년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은 한판 싸움을 벌였다. 현대그룹은 3월15일 중앙일보를 뺀 중앙일간지에 5단 크기의 `해명서'를 실었다. `삼성이 소유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등 중앙매스컴이 대대적 집중보도를 통해 여론을 오도해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해외공사 수주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현대그룹은 “한국 언론의 내일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중공업의 내일을 위해서도 기업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 재벌 비호의 언론을 진정한 언론인의 언론으로 되돌려놓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고 호소했다.


결국 두 재벌 수뇌부의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 사건을 계기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그룹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신문을 소유하고자 하는 꿈을 키우게 됐고, 이 꿈은 노태우 정권 아래인 1991년 11월1일 <문화일보> 창간으로 이어졌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22117089.html


[언론권력] 중앙일보, '판매전쟁' 끝없는 도발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 때부터 5년간 삼성의 지원을 바탕으로 신문시장의 무한 판매경쟁을 주도한 데 이어, 72년부터 한번 더 판매경쟁에 불을 붙였다.




72년 한국신문협회 결의를 무시하고 서울~부산 신문수송을 단독으로 강행해 판매협의로부터 제명당했고, 74년에도 같은 일을 되풀이해 제명 조처를 받았다. 75년 4월7일 신문의 날에는 휴간을 위반해 동업자들의 원성을 샀다.


69년 조선일보사 사장인 방우영씨까지 중앙일보사 사장인 홍진기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재벌이 자금을 동원해 신문업계를 장악하려고 하니 장사가 본업인지 신문이 본업인지 모르겠다. 중앙이 일등을 하겠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독주할 때 나오는 부작용과 원만을 어떻게 감수할 것이며, 그것이 삼성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방우영, <조선일보와 45년>)
자본에 바탕한 이런 공격적인 판매경쟁은 중앙일보 자체 발표 기준으로 74년 3월 50만8천부이던 하루 평균 발행부수를 75년 9월22일 70만부, 78년 12월12일 100만부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신문협회는 75년 5월, 77년 7월, 79년 9월 등 세차례에 걸쳐 △확장지무가지 규제 △월정 구독료 엄수 △판촉 경품 사용 금지 등의 신문판매 정상화 결의를 했으나 그리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중앙이 주도한 신문간 판매 경쟁은 76년 5월 이후 같은 석간신문으로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던 <동아일보>와의 전면 대립으로 발전했다. 동아는 같은해 5월10일 `입장료 비싼 용인 패밀리랜드, 빈약한 시설에 과대선전만'이란 제목으로 사회면 머릿기사를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4일에 걸쳐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같은달 17일부터는 `용인자연농원의 내막'이란 시리즈를 내보냈고, 6월28일부터는 삼성그룹의 땅투기를 비판하는 `땅의 애사'란 시리즈를 연재했다.


동아의 중앙 비판은 그뒤에도 계속된다. 동아가 78년 4월12일엔 `삼성조선 관련 혐의, 설계도 절취사건'을 보도하자, 중앙은 지면을 통해 정면으로 반격하고 나섰다. 동아가 이 사건을 캐고 들어가자 삼성은 중앙에 원색적인 광고로 맞대응했다.


“이제 악의와 중상과 허구의 보도로써 진실을 고의로 외면하고 국민의 이목을 현혹해 온 동아일보의 반사회적 누습이 또 다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 동아일보는 계속 실추되고 있는 사세를 만회해 보겠다는 저의에서 앞으로도 더욱 반사회적, 반의도적인 비열한 수법으로 우리를 헐뜯는 데 발벗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중앙 4월15일치) 동아는 또 80년 3월18일 용인자연농원의 양돈장에서 돼지 3만여마리의 분뇨가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에 버려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221110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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