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권-언 유착


사주, 무릎꿇고 술올려 



198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과 신문사주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자신의 방미 사실을 언론이 작게 다룬 것에 서운함을 느낀 노 대통령이 다음부터 기사를 좀 크게 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한 초청자리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동동주와 생선회로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사진설명]1988년 12월 언론청문회의 증언대에 선 언론사 사주들. 왼쪽부터 김상만(동아), 방우영(조선), 이종기(중앙), 장강재(한국)씨. 80년 신군부가 벌인 언론통폐합과 기자 대량해고를 5시간 동안 추궁당한 방우영 회장은 뒷날 사보를 통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라 말했다. 한겨레 사진부photo@hani.co.kr

갑자기 ㄱ 사장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하, 제 술 한잔 받으시죠.”
ㄱ사장은 동동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잔에 따랐다. 순간 대통령은 당황했다.
“아니 편하게 앉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ㄴ 사장이 “각하, 각하, 하는 것은 옛날 호칭 아닙니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ㄱ사장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나는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았으니 옛날 식으로 하는 것 아니오. 해방 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 하고는 다르지”라고 응수했다.
ㄴ사장은 “아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너무 어린애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나도 환갑이 내일 모레입니다”라고 화를 내며 위스키 한 병을 따로 시켰다. ㄴ사장은 양주병을 들고 대통령에게 “자, 제 술도 한잔 받으시죠”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미안합니다.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다투지 마시고 즐겁게 마십시다”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지자 노 대통령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노 대통령이 나가자 ㄱ사장은 ㄴ사장에게 화를 냈다. “아니 이 사람, 나는 자네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데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나. 나는 자네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ㄴ사장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버님까지 들먹거릴 필요는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ㄱ사장은 “뭐라고. 아니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너 혼 좀 나볼래”하고 되받았다. ㄱ사장이 ㄴ사장의 멱살을 잡자 ㄴ사장도 지지 않고 ㄱ사장의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것을 다른 사장들이 간신히 말려 술자리가 끝났다.
이날 말다툼의 계기는 회식 때 ㄱ사장이 대통령에게 “방미 기간중 기사가 작게 취급된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면서 “언론계 대표로서…”라는 말을 덧붙여 경쟁신문사인 ㄴ사장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코미디 같은 이 이야기에는 아부와 굴종, 배신이란 언론과 권력의 함수관계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노 대통령은 수십개가 넘는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중에 유독 특정 신문 사주들만 뽑아 이날 청와대 회식자리에 초청했다. 노 대통령은 이 신문 사주들만 잡으면 언론 논조를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노 대통령 앞에서 “방미 기사가 작아서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바치던 사주는 뒷날 자기 회사 사보를 통해 노 대통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참 싱거운 사람이다. 한가지 특색이라면 외유를 선호했고 그때마다 크게 써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면종복배. 살아 있는 권력에는 굽실거리다 죽은 권력에는 발길질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이다.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가 여론시장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언론 자유를 포기하며 누린 독점적 특혜를 무시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정책에는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언론기본법 같은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있었다.

전 정권은 언론통폐합 이후 새 신문사 등록을 아예 불허했다. 경쟁 없는 독점 시장 체제에서 늘어나는 광고 수요는 언론사 사주에게 막대한 경영이익을 보장했다. 광고물량이 크게 늘어나자 신문사들은 지면을 늘리기 위해 윤전기 도입에 나섰다. 전 정권은 82년 1년에 한해 관세법 부칙 개정을 통해 신문사들이 윤전기를 들여올 때 관세를 20%에서 4%로 깎아줬다. 81년부터 87년까지 조선·동아·중앙·한국일보의 연평균 매출액 증가가 약 19%였고, 이들 신문사의 매출액은 6년 동안 2배 이상 늘었다.

권력과 언론사주들의 관계는 박정희 정권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박 대통령은 재임시 1년에 한두 번 의례적으로 신문사 발행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환담을 나누었다. 그가 자주 독대한 언론인은 당시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과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 정도였다고 한다.

족벌신문 사주가 권력의 품에 안길수록 신문은 자유언론과는 멀어졌다. 75년 3월 조선일보 기자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펴자 방우영 사장은 3월7일 `가차없이 처단하겠다'는 사장 명의의 경고문을 회사 안에 붙였다.

“사규에 어긋나는 처사일 뿐 아니라 기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난폭한 수법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끝까지 혁명적인 수법으로 55년의 기나긴 전통을 미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먹칠과 분열을 일삼는 사원이 만의 하나라도 잔재한다면 조선일보의 앞날을 위하여 분명히 그리고 가차없이 처단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자유언론 회복을 위한 자사 기자들의 투쟁을 방우영 회장은 뒷날 사보를 모아 펴낸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분통과 쓰라림과 충돌이 이어진 비극 속에서 조선일보의 치욕의 한장이 기록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방 회장이 요즘 자유언론 수호와 할 말을 하는 신문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누가 방(우영)회장이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소리를 한다면 나는 조선일보 주필의 이름으로 그것을 반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평기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장이 편집국에서 농담처럼 던지는 말 한마디가 그날의 신문제작에 그대로 영향을 끼쳐버리는 참담했던 순간들을…. 편집국의 한 기자는 기자 초년병 시절 편집국에서 목격한 하나의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편집권 행사의 최고회의체로서, 신성불가침한 것으로만 알았던 편집국장 주재하의 부장단회의가 예고없이 방문한 사장의 `고함' 한마디에 풍비박산 나버리는 장면을…. 높고 높게만 보였던 데스크가 저러하거늘 나 같은 졸개 기자야….”(88년 12월28일치 <조선노보>)

얼마전 정치권에서 `제왕적'이란 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신문사 안에서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절대복종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신문사 사주야말로 `제왕적'이다.

지난 3월 동아일보를 떠난 김재홍 전 논설위원은 <미디어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언론사와 사주는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자와 논설위원은 그렇지 못한 게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고 말했다.

“지금은 편집국장, 주필과 생각이 다르면 같이 일할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런데 편집국장과 주필은 사주에 장악돼 있어 제작방침과 논조가 일원화돼 왔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인정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혼재해 있는 신문사가 발전할 것이다. 언론과 독자가 `다양한 의견의 시장'인 것처럼 기자도 마찬가지다. 소속원의 대외활동도 소속 신문사의 논조와 방침으로 규제하려고 해 방송 토론프로그램에 나가서도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분위기다. 허가는 물론 발언 내용까지 알려야 한다.”


실제 지난해 10월3일치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 신문의 한 논설위원 칼럼이 사주의 입김으로 삭제된 것은 족벌언론 안 언론 자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지난해 10월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은 고려대 정문 앞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강을 막는 학생들에게 낮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90년대 들어 한국기자협회나 한국언론재단 등이 벌인 언론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언론 자유의 저해요인으로 정치권력보다 사주를 꼽는 답변이 휠씬 많아졌다. 60·70년대 절대권력의 횡포에 대해 입다물고 80년대 권력에 영합해 이득을 챙기고, 90년대 들어 스스로 권력화한 `제왕적' 사주. 이들의 권력을 그대로 두고 더 이상 자유언론은 없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81838004.html


[언론권력] 자유언론 의지마저 상업주의 도구 이용

1970년대 언론은 민주화 투쟁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유린 등을 외면했다. 자연히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범죄적인' 신문제작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75년 3월6일 제작거부 농성을 벌이다 사주에 의해 해직된 기자들이 만든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는 75년 4월 충격적인 진상보고서를 냈다. 여기에는 <조선일보> 사주가 기자들의 순수한 자유언론 실천의지를 상업주의적 목적을 위해 어떻게 이용하고 배신했는지 담겨 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 투쟁을 벌인 뒤 각 신문사 기자들 사이에 자유언론선언운동이 벌질 때였다. 회사쪽은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적어도 2등은 해야 한다”고 은근히 뒤에서 고무·격려했다. 동아일보와 더불어 이른바 전통 있는 민족지를 자부해온 조선일보로서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칠 때 조선일보 기자들이 침묵할 경우 `사꾸라신문'이란 오해를 받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35년 7월6일 서울 태평로1가 새 사옥 낙성식을 하고 “동아일보는 3층이고 조선일보는 4층이다”는 사설까지 실을 만큼 동아일보에 대한 경쟁의식이 뿌리깊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하고 난 뒤 조선일보 기자들 사이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간부들은 은연중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73년 이미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 수호선언문을 냈지만 조선일보 기자들은 며칠이 지나도 선뜻 단합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사 한 명이 기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선일보 기자들은 왜 용기들이 없느냐”며 은근히 투쟁을 종용했다. 당시 기자들은 이것을 이사 한명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투쟁하라'는 회사쪽의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74년 10월24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자 간부들의 일반적 태도는 “잘들 했어. 2등은 해야지. 동아일보를 바짝 뒤따라 가야지”였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들이 회사가 허용하는 어용성의 한계 안에서 적당히 머물 것을 거부하고 꾸준하게 자유언론을 실천해 가려고 하자 74년 12월 회사는 기자 2명을 해직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회사측이 신문의 생명이라 할 언론자유를 그때그때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반언론적 태도를 즉각 청산하고 본연의 양심과 정도를 되찾아 주기를 간절히 요망합니다.”(조선투위 진상보고서 마지막 문장, 75년 4월11일)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81906031.html


[언론권력] 동아 사주, 청와대 눈치보기 급급 

1974년 12월27일, <동아일보>를 펼쳐든 독자들은 어리둥절했다. 3면 광고란에 익숙한 기업광고 대신 `민주시민'들의 광고게재를 부탁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 피아르 1'이 실렸다.

74년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 광고주들은 뚜렷한 이유 없이 한꺼번에 광고예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7개월 동안 이어진 이른바 광고탄압은 박정희 정권이 기업들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압력을 넣어 신문의 자금줄을 끊어 말려 죽이겠다는 비열한 술책이었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이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등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 뒤 그동안 금기시해온 유신반대 시위와 집회기사를 싣기 시작한 것이 광고탄압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치며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기자들은 정권과 결탁한 사주에 의해 해직되어 동아일보를 떠났다.


광고 탄압이 한창이던 75년 2월 초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이 `자유의 금펜상' 후보로 선정됐다는 전문이 국제신문발행인협회로부터 날아들었다. 동아일보쪽은 `자유의 금펜상'이 매년 세계에서 글이나 행동으로 언론자유 증진에 크게 이바지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언론인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상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민족과 더불어 80년> 동아일보사)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의 한 관계자는 사주인 김상만 사장이 광고탄압에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가 부족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시민들의 성원 광고를 부탁한 `동아일보 신문광고 피아르 1'이 나간 74년 12월27일 오후 김상만 사장과 이 관계자 사이에 오간 이야기다.


“이게 뭐냐?”
김 사장은 피아르 1 광고가 실린 27일치 신문을 내놓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신문의 자유는 광고의 자유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 기본논리를 풀이해 독자들에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청와대가 지금 발칵 뒤집혔어.”
“아니 청와대가 발칵 뒤집힐 게 아니라 청와대가 손을 들어야죠.”

김 사장은 한참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이거 또 하느냐”고 물었다.
“박 정권이 손 들 때까지 해야죠. 계속 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 김 사장은 “다음에 (광고) 나갈 때는 이사인 판매국장의 결재를 받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속으로 `사주가 싸우는 데 제동을 거는구나. 결재를 맡으라고 하니 결국 하지 말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김 사장은 “사장의 명령이다. 앞으로 결재받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관계자는 그때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하겠다'는 말 대신 `알겠다'고 하고 사장실을 나왔는데 속에서 울컥 올라왔어요. 아무리 사주라고 하지만 지금 동아일보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사람을 격려는 못할 망정 처벌하겠다니…. 이게 동아일보 사장이냐, 장사꾼이지. 정말 괘씸했어요.”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81914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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