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2. 동아일보의 친일곡필
“조선통치 익찬 다하려 ‥”사고게재
독립투쟁단 인명살상 폭도로 묘사
“지원병제는 반도통치 신기원”
“옥체 강건하옵시고 황실 무궁하옵기를”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총알받이 미화
[사진설명] (맨위) <동아일보>는 38년부터 40년 폐간되던 해까지 해마다 1월 1일치 1면 머리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찬양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사진은 일왕을 `대원수 폐하'라고 부르며 정무·군무에 부지런히 힘쓰신다고 찬양한 40년 1월 1일치 1면. (좌)37년 6월 2일 장기 정간 뒤 처음 나온 속간호 1면 하단에 실린 '사고'.“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글귀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아래)동아일보는 일제의 '지원병'으로 끌려가 비명에 간 젊은이 이인석의 죽음을 “지원병 최초의 꽃”“조선인 지원병의 영예”라고 선전햇다.(39년 7월 8일치)또 이튿날에는 고향집을 찿아가 죽은 이의 처까지 끌어들여 침략전쟁의 선전도구로 만들었다.(7월 9일치)
1936년 8월. 식민지 조선 민중의 가슴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당시 `마의 벽'이라던 2시간 30분 벽을 돌파하며 1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희소식은 동시에 비보이기도 했다.
조선의 아들 손기정이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기 때문이다. 이해 8월 25일 <동아일보> 체육부의 이길용 기자는 월계관을 쓴 손 선수의 금메달 수상 사진에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 이를 신문에 내보냈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총독부의 분노를 촉발시킨 이 사건으로, 이길용 기자 등 8명이 구속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279일이라는 최장기 정간 끝에 다음해에야 속간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1976년 나온 <동아일보사사>는 이렇게 전한다.
“이런 민족의 아픔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의 대변지를 자임해 온 본 동아일보가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누구의 지시도 아니, 명령도 아닌 거의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접한 경영진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사실을 알고난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인촌 김성수전>, 동아일보사, 1976)
동아일보는 이길용 기자와 관련자들을 쫓아낸 뒤 다음해 6월 2일 속간과 함께 낸 `사고'에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 하고 스스로 `일본 언론'임을 서약했다.
이 사건의 또다른 진실은 `일장기 말소'가 동아일보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장기 말소 사진은 동아일보보다 12일 앞서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에서 먼저 내보냈다. 동아일보가 다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내보내면서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에 대해서도 무기한 정간 처분을 내렸고, 조선중앙일보는 이 일로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친일적 행태는 1932년까지 올라간다. 이 해에 터진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동아일보는 “대불경(大不敬) 사건 돌발/어로부에 폭탄투척/폐하께옵서는 무사 어환행/범인은 경성생 이봉창” 이라는 제하에 <조선일보> 및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사와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냈다. 이봉창 의사를 `범인'이라 부르고, 폭탄 투척이 `크게 불경스러운 일'이며 `천황 폐하'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내용에서 `민족지'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또 이 시기 국경지방의 항일무장독립투쟁단을 동아일보는 인명을 마구 살상하고 돈을 뜯는 폭도로 묘사하였다. `최근 중대 사건 빈발/인명살상 납거, 자금 징수 등'이라는 제하의 34년 8월 25일치 기사는 이렇게 돼 있다.
“반만항일군과 조선○○군의 활동은 이즈음 지극히 맹렬하여… 압강구를 습격하여 전 초산경찰서 순사 김용흥의 방에 침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의 부부에게 중상을 입히고 김의 장남과 장녀를 죽였음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이외의 것을 소개하면 인질납거, 군자금 강징, 반동분자 기타 총살 등 무시무시한 사실이 많다.”
일장기 말소 사건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뒤 동아일보의 친일논조는 한층 색채가 짙어졌다. 이해 7월 19일 조선일보가 일본군을 아군·황군으로 표기하 시작한 것과 때를 맞추어 동아일보도 아방·아군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이래 지면에서 `일본=우리나라'는 의문의 여지 없는 등식이 된다.
“…이때에 있어 황군의 노(勞)도 노려니와 총후(후방)의 성의도 여기에 자세히 매거할 것 없이 열렬하였다. …전 조선적으로 팽배하는 애국의 지정(至情)을 축복하는 동시에 다시금 시국 재인식의 기화를 삼아 다시금 일층 격앙발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37년 9월 7일치 사설 `애국일')
일제가 명절로 꼽았던 명치절에 대해서도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양 보도했다.
“명치 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3일의 명치절! 이날의 아침부터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37년 11월 4일치 2면 머릿기사)
1938년에 들면 일제의 징병·징용·공출 등의 인적·물적 수탈이 본격화하고 동아일보의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도 더 한층 선명해진다. 4월에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한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조선의 혼을 빼앗는 `교육령'을 개정·공포한다. 이 제도에 반대해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투쟁을 벌이다 40여명이 투옥됐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 제도의 실시를 축하'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조선 민중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제 일보다. … 이러한 정세에 있어서 미나미 총독의 영단은 역대 총독이 상상도 하지 않던 병역의 의무를 조선민중에게 부담시키는 제일보를 답출(踏出)케 한 것이다. 이에 조선 민중도 이 제도가 실시되는 제1일부터 당국의 지도에 순응하여서 그에 협륙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또한 교육령 개정은 미나미 총독의 5대 정강중의 국체명징, 학제쇄신의 구체화로서 조선 교육사상 획기적인 것이다.”(38년 4월 3일치)
또 바로 다음날 날 기사를 통해서도 “전승의 영광에 빛나는 양춘, 찬연히 빛나는 반도 통치사의 한 페이지― 제국의 숭고한 사명 수행에 바친 2천3백만 민중, 애국의 지성이 결실하여 이에 조선일 지원병 제도와 신조선 교육령이 형영상반(形影相伴)하여 실시되어 반도통치에 하나의 신기원을 획한 환희의 날” 이라고 찬양했다.
또 `지나사변'(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7월 7일 사회면 머릿기사는 “조선은 병참기지로서의 중대한 존재로 총후 국민의 열렬한 단결, 호국의 운동은 다른 각 지역에 앞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고 전하고 사설도 “사변 1주년을 당함에 있어서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감격적으로 쓰고 있다.
앞서 친일매국 단체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자 동아일보는 7월 2일 치 사설을 통해 “중국 장 정권을 지원하는 영·불·소의 반일적 행동과 태도라는 난관을 물리치고 극동의 영구평화를 확립하려는 위업을 달성하려 할진대 장기에 긍한 국가총력전의 이행이 필요하다” 고 역설하면서 “민중은 모름지기 `연맹'의 지도에 순응하여 모두가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듯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친일매국을 선동했다.
또 이 해 총독부가 실시한 조선인 지원병 모집으로 6월15일 육군지원병 훈련소가 문을 열자 동아일보는 이를 “영예”라며 흥분되어 보도한다. 나아가 다음해 지원병 최초로 전사자가 나자 다시 “조선 지원병의 영예”라고 하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제국주의의 총알받이가 되도록 권유한다.
“조선인 지원병 최초의 명예의 전사자 이인석 군은 총독부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제1기 전기 졸업생으로 재소 중에도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작년 여름 입대 후에는 총후 조선의 여망에 맞추어 군문에 정예하다가 지난번 제일 충정을 보게 되자 굳은 결의를 보이고 용약 출정하였던 것이다.”(39년 7월 8일치)
이어 이튿날에는 일제 침략의 총알받이로 죽어간 희생자의 집안을 찾아가 `영예의 전사한 이인석 가정방문기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 부군 못지 않은 부인의 결의'라는 제하에 “생활은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지원병을 지원하였던 터인데 이군의 부인은 `전선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은 남자의 당연한 일이오니 슬픈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부군에 못지 않은 굳은 뜻을 보이었다” 고, 전사자의 부인까지 일제찬양의 입으로 끌어들였다.
39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동아일보는 `봉축 천장가절'이라는 사설을 내보낸다.
“천황 폐하께옵서 38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는 날이니 …더욱이 옥체 어강건하옵시고 황초 또한 견강하여감을 배문(拜聞)함은 국민의 영광으로서 앞으로 더욱 황실의 어번영과 보산의 무궁하옵기를 봉축하는 바이다 …과반 제국의회 개원식에 당하여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여 동아 영원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로 국민정신의 앙양과 국가총력의 발휘에 의치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하옵셨다. 이 어분부를 봉배하여 국민은 정신을 총휘하고 국가의 총력을 겸발하여 일의매진, 사변목적 달성을 필기하여야 할 것이다.”
또 40년 일왕 히로히토 생일에는 “1억 민초는 항상 황은의 광대심후함에 감격을 새롭게 하고 봉응경앙의 염을 굳게 하거니와 국민은 산업달성 시간 근복에 경일층의 결심과 각오를 함으로써 빨리 성업을 완성시켜 예려를 봉안하고 성지에 봉부하는 것이 1억 국민의 총중이 아니면 안 된다”
고 거듭 맹세한다. 일제에 저항다운 저항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한 채 너무도 무력하게 굴종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극렬한 친일논조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40년 8월 10일 폐간된다. 일제가 조선어말살정책과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사는 사사에서 “이즈음 동아·조선 양대지의 논조와 색채는 이미 매일신보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퇴색해 있었다”(<민족과 더불어 80년>)고 자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쨌든 동아일보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사주 김성수는 매일신보에 학병 출전을 독려하는 논설을 쓰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839863.html
[언론권력] 일제하 조선·동아의 친일광고 백태
“축 징병령”“황군 무운 기원”
조선.동아 광고도 친일 앞장
어린이까지 선전 이용
‘기(祈)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1937.10.13) ‘축(祝) 남경함락(南京陷落)’(1937.12.22) ‘봉축(奉祝) 명치절(明治節)’(1939.11.3) ‘축(祝) 지나신정권성립(支那新政權成立)’(1940.4.18)
얼핏보면 신문기사의 큰 제목 같지만 사실은 일제 당시 한 국내신문에 실린 광고 선전문귀들이다.기사보다도 훨씬 노골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당시의 자사신문을 두고 ‘민족지’라고 강변해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에는 친일기사 이외에도 지면 하단부 광고란에는 이같은 친일광고가 수도 없이 많이 실렸다.두 신문 가운데 대량의 친일광고를 게재한 신문은 조선일보쪽이다.조선일보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 이후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하는 광고를 잇따라 게재했다.(사진 위) 기사에서 일본군을 아군(我軍),황군(皇軍)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그 아래 광고란에서는 이들에게 위문품을 보내자거나,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는 문귀를 담은 상품광고를 버젓이 게재했다.특히 이 신문들은 일부 친일기업인들이 전쟁특수를 노려 ‘후방의 위문대(袋) 지원은 전선과 후방을 잇는 가교’라고 선전해대자 이에 발맞춰 현란한 군국주의 문귀와 함께 전선의 군인을 등장시켜 전쟁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일제하 조선일보에 게재된 친일성향의 광고는 총340여건으로 나타났다.시기별로는 만주사변 이후(1932.3∼1933.5) 14건,중일전쟁 이후 폐간때까지(1937.7∼1940.8) 326건 등이다.또 조선일보의 자매월간지인 ‘조광(朝光)’에 게재된 친일광고 건수는 70건 정도로 집계됐다.이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보다는 적은 양이지만 경쟁지였던 동아일보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다.
조선일보는 만주사변 발발후인 1932년 3∼4월경에는 ‘부상전사를 위로합시다’정도의 친일광고를 실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문귀를 담은 광고를 실었다.몇가지 예를 들어보면,중일전쟁 발발 2개월후인 37년 9월 7일자에는 총후(銃後),즉 후방의 주민들을 상대로 ‘총후의 책무,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귀가 담긴 상품광고를 실었으며,조선일보 6,000호 기념호인 이듬해 3월 1일자에는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문귀가 담긴 인단(仁丹)광고를 실었다.또 이해 5월 5일자에는 ‘군민일여(軍民一如) 거국적 국가보국(報國)’이라는 선전문귀의 아지노모도의 광고를 실었으며,6월 8일자에는 ‘장기전(長期戰)에 준비하자’는 모리나가건빵의 광고를,11월 16일자에는 ‘중지(中支)에도 남지(南支)에도 황군(皇軍)의 기(旗)빨이 휘날리게’라며 멘소레담 광고를 실었다.특히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37년 9월 7일자에는 어린이들이 일장기와 총,일본도(刀)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는 그림과 함께 ‘총후의 책무 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귀가 적힌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이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선전매체로 동원하여 침략전쟁을 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아래) 이같은 광고는 어린이들에게 단순히 전선에 위문대를 보내자는 정도가 아니라 어린이는 ‘내일의 일본군’(1937.10.28),‘작은 용사’(1937.11.14)라고 지칭하면서 ‘애기들이 자라나면 일본이 성장한다’(동아일보,1939.11.18)고 강변하는가 하면,태평양전쟁 무렵에는 ‘건아 만세! 뻗어나는 일본의 저력’(매일신보,1943.4.15)이라며 어린이들을 ‘미래의 전사(戰士)’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역시 상당수의 친일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1941년 1월호에는 ‘축(祝)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신춘(新春)’이라는 문귀의 인단광고를 실었으며,이듬해 2월호에서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일억일심(一億一心) 총동원’광고를 실었다.태평양전쟁 발발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6,7월호에서는 ‘축(祝) 징병령시행’문귀의 광고를 실어 은연중에 징병제를 선전하였으며,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전쟁에서 최후까지 이겨내기 위하여’(1944.6월호)‘싸우는 여성은 강하다’(1944.5월호) 등의 자극적인 문귀를 담은 광고물 게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운현(친일문제연구가)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928762.html
[언론권력] 1939년 7월 7일치 1면 사설 '지나사변' 전문
<동아일보>가 중일전쟁 2주년을 맞아 1939년(소화 14년) 7월7일치 1면 머리로 내보낸 사설 `지나사변 2주년'(사진). 중국침략을 중국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왜곡하고 전 조선인의 일제 충성을 선동하는 사설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7일은 지나사변 발발 제2주년 기념일이다. 시간(時艱) 극복에 매진하는 총후 국민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전몰장병의 영령에 경건한 묵도를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좀더 큰 시간에 대처할 결의와 준비를 갖출 날이다. 그리고 이날은 우리 국민에 한하지 않고 아시아의 민족이 총기하여 기념할 날이며 후일 역사상에 특기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돌아보면 재작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에서 발단한 지나사변이 오늘과 같이 진전되었으니 이것은 결코 우연적인 사실이 아니었고 지나(중국)측의 무모한 항일용공(抗日容共)의 도전적 태도에 대한 부득이한 거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륙의 민중으로 하여금 질곡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하여 먼저 장개석 정권을 타도하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음으로 양으로 장정권을 원조하는 제3국의 온갖 마수를 청소하여 동양에 구원한 평화를 가져오고서 마침내 신무의 예검을 들게 되었으니 지금 대지에는 방공친일(防共親日)의 대기가 나부끼고 거룩한 흥아의 신사명이 전 아시아 문중의 축복을 받으면서 가장 씩씩하게 수행되어 가는 중이다. 그동안 충용한 황군은 그 모든 신고를 참아가면서 삭북의 위준한 산악에서 혹은 강남의 망향한 야원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군을 공격하여 파죽의 세로써 연전연승의 전과를 거두어 만리장성의 벽상에 혹은 대황하의 연안에 혹은 자금산두에 혹은 저 멀리 해남도중에까지 광휘 있는 일장기가 번창하게 되었고 그 작전의 규모가 크고 또는 전투의 성과가 큰 것은 인류의 전쟁사상에 실로 공전의 기록이었다. 이것은 오직 황공하옵신 폐하에 보국진충을 다한 출전장병의 무훈이 혁혁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총친화의 대도에 내선일체의 구현으로써 사변목적 달성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81916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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