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5·6공 왜곡보도


5.6공 안보상업주의 '굽은 펜'



1986년 10월 30일 당시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충격적 발표를 했다.

“2백억t의 물을 담은 북한 금강산댐이 붕괴될 경우 화천 등 5개 댐을 순식간에 차례로 파괴하면서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 강원 경기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황폐화시키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른바 `평화의 댐' 오보의 시작이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모든 신문들이 `63빌딩의 절반이 가까이 물에 잠긴다'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 `원폭투하 이상의 피해' 등 정부의 발표에 장단을 맞추어 해설 사설 등 지면을 총동원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대로 당할 수 없다'며 규탄시위가 줄을 잇고 평화의 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신문과 방송은 어린이 저금통까지 털어 성금 참여를 독려하는 모금운동을 펼친 결과 740억원의 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평화의 댐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88년 8월 1일치는 “평화의 댐은 불신과 낭비의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고 비꼬았다.
93년 6월 감사원이 전면특감에 들어가면서 평화의 댐은 완전히 조작된 정보에 의해 꾸며진 허구임이 드러났다.

5공 정권이 엉터리 금강산댐을 들고나온 배경은 86년 대통령 직선제 요구로 뜨겁던 개헌정국을 돌리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었다. 줏대없는 언론이 정권안보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6년 6월에 터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정권의 부도덕성과 함께 타락한 언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시위 참가 여학생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경찰관이 상상도 힘든 못된 짓을 한 사건을 놓고 언론은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검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조선일보는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 폭행만 했다'(86년 7월17일치)는 검찰 발표문을 제목으로 뽑았고 나아가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이란 제목도 등장했다. `부천서 사건-공안당국의 분석'(86년 7월7일치 조선일보)에서는 “급진세력의 투쟁전략 전술 일환-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고 사건의 성격을 악의적으로 규정하고 중앙일보도 `성 모욕행위는 없었다'(86년 7월17일치)이란 검찰 발표문을 제목으로 뽑았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7월18일치 사설 `부천사건에서 얻는 것'은 “이 시점에서 수사권 밖의 사람이 진실이 어떻했는가를 가릴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성고문 보도를 왜곡보도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이 낸 <조선노보>에 따르면, 보고서를 읽은 조선일보 기자들은 `표현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 신문 제작 책임자선에서는 “이 보고서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은) 동아일보 해직자들 작품이다”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다.

“작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발생 당시에도 편집국 내에선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며 `보호해 줄 가치가 없다'는 애기가 오갔었다.”(87년 7월18일 조선일보 사회부 평기자들의 `조선일보 편집에 관한 의견서')
피해자인 여학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성고문 사건을 고발했는데도 이를 왜곡한 대다수 언론인들은 권력이 주는 뒷돈까지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검찰출입기자들은 난데없이 두툼한 봉투를 나누어받았다. 당시 당국이 은밀히 밝힌 봉투의 내역은 통상적인 여름휴가비에다 법무부장관 취임 1주년 인사비가 합쳐진 것으로 전해졌다.”(88년 12월17일치 <경향신문>)

고문사건에 대한 굴절된 보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85년 10월29·30일 각 신문은 서울지검이 발표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정'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 민추위사건을 보도하며 민추위 사건 배후로 발표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인 김근태씨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강조했다.
10월30일치 중앙일보는 검찰이 만들었다는 `북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과 `민주주의 민족민주혁명론'을 비교하는 표를 싣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검찰의 민추위 수사가 뜻하는 것'이란 기사에서 “직업혁명가를 자처하는 일부 재야단체 인사들과 과격운동권 학생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절단하는 작업이야말로 순수한 학생·근로자를 보호하고 사회안녕질서를 위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발표문인지 기사인지 구별이 힘든 대목이다.

공안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기던 언론은 김근태씨가 법정진술을 통해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88년 2월15일 서울고법은 김씨에 저지러진 고문사실을 인정하고 경찰관 4명을 재판에 회부키로 결정했다. 85년 당시 검찰이 발표한 김근태씨의 범죄사실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벌인 고문의 결과임이 밝혀졌다.
고문에 대한 조선일보의 얕은 문제의식은 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찰관 2명이 구속 수감될 때도 나타났다.
경찰은 수감되는 동료를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 똑같은 방한복과 방한모를 입은 동료 경찰관 10여명을 함께 승합차에 태웠다. 10명의 사내들이 차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각 신문에 실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를 고발했다.

조선일보도 이 모습을 찍었지만 끝내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그날 밤 이 사진에 대해 `당신들은 동료가 구속되면 감싸주는 인정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 떨어졌고 결국 신문에 나가지 못했다.”(조선노보 89년 6월8일치 호외)

86년 11월 김일성 주석 사망 오보는 `안보상업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북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소문이 15일 나돌아 동경 외교가를 한동안 긴장시켰다. …이 소문의 내용은 중공국가 주석 이선념이 지난달초 평양을 방문하기전에 북한군 일부에서 김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암살기도 가담자들은 중공으로 도주했으며 북한이 중공측에 대해 이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해 오던 중 이 사건에 가담했던 나머지 일파들이 결국 김을 암살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

86년 11월 16일치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 기사는 단지 소문을 전달했을 뿐이다. 처음 ‘피격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조선일보는 이틀 뒤인 18일부터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했다. 신문 12면중 7면을 관련 기사로 채운 조선일보는 `주말의 동경급전… 본지 세계적 특종'이라 자화자찬했다.

조선일보의 보도 이후 연일 신문들은 `열차에서 총을 맞았다' `폭탄에 당했다' `쿠데타가 발생했다' 등 추측으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18일 오전 김 주석이 평양공항에서 외국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이 북한 텔레비전에 나왔다. 조선일보의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오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숱한 북한 오보에서 그랬던 것처럼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식으로 버티며 독자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되었다”고 쓰면서 책임을 엉뚱하게 북한에 떠넘겼다.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도 조선일보는 왜곡 보도를 했다. 문 목사가 평양방문 뒤 베이징에 도착해 한 기자회견을 보도한 조선일보 89년 4월5일치 제목은 `문씨 “돌아가고 싶지 않다”'였다. 문 목사의 가족들은 5월2일 언론중재위에 조선일보의 기사제목 중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부분은 “솔직히 말해 귀국 후 감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부분을 왜곡한 것이라며 중재신청을 했다. 문 목사는 베이징 기자회견 당시 “귀국후 구속되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모처럼 뚫린 남북의 대화 통로가 막히지 않도록 이번만은 감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나 조선일보가 기사본문에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라고 보도하면서도 정작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을 명시하지 않아 의혹을 사게 하고 나아가 제목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표시해 문 목사의 신념을 의심케 했다고 주장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시기 왜곡과 곡필은 비단 지면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사주들의 모습 또한 지면만큼이나 추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62224392.html



80년대 문공부 '시시콜콜' 보도지침



신문에서 사건의 취급 여부, 기사의 방향, 크기 어느 면에 배치할 것인가를 누가 결정할까. 편집국장과 기자가 판단할 이 일을 1986년까지 정부기관인 문화공보부에서 사실상 전담했다.

문화공보부로부터 보도지침을 받아 적어 보관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원본(1986년 7월 17일치)의 사진. '취재보도 불가''일절보도 불가' '꼭 실어줄 것'등의 말이 보인다


전두환 정권 때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날마다 특정사안에 관련해 신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비밀통신문'을 언론사에 내렸다. 80년대 언론통제의 구체적 물증인 이른바 `보도지침'이다.

예를 들어 86년 7월17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은 다음과 같다.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문화공보부는 오직 권력의 이해관계란 기준에 따라 모든 중요 사건에 대해 `보도 가' `보도 불가' `절대불가'의 판정을 마음대로 내렸다.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 보도지침은 86년 9월16일 발행된 <말> 특집호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한국일보)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한편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언론협조사항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장이 통상 국가적 기밀사항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언론보도에 신중을 기해 줄 것을 언론사에 요청한 경우, 그 요청을 받은 언론사는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사실보도에 참고해 오는 것이 국내외 언론계의 관행으로 되어 있음에도…”라며 보도지침의 본질을 호도했다.

기소된 언론인 3명은 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캐나다 신문협회, 김수환 추기경 등 나라 안팎에서 구속 언론인 석방 촉구가 줄을 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를 상징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역들은 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으며 김주언 기자는 현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62030852.html



90년대에는 사주의 보도지침

1991년 가을 <동아일보> 편집국에서는 이른바 `신판 보도지침'이란 괴문서가 돌았다. 80년대 보도지침은 정치권력이 만들었지만 90년대 보도지침은 언론권력이 만들었다.91년 9월 6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취임식에서 김중배 국장(현 문화방송 사장)은 이 보도지침을 지칭하며 자본의 언론통제를 경고하고 사표를 던졌다.

김 국장은 “90년대 들어 언론이 이제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제약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동아가 취한 일련의 인사조치와 국장 경질 뒤 자유로운 편집을 제약하고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는 일명 `보도지침'이란 괴문서가 사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침묵하는 기자들에게 신문자본과의 싸움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며 해직이 아닌 사직이란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기자협회보>에 `숨은 권력과 편집국 민주주의'를 기고해 발행인의 편집권 유린을 비판한 손석춘 기자도 같은 날 사직했다. 술렁이던 편집국 기자들은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발행인과의 대화'자리까지 마련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은 자신의 제2창간 편집방침을 정리한 문건을 사내에 돌렸다.

“…동아가 사회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고 또 극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에 의한 체제의 성토광장으로 이용될 소지나 우려를 준다면 이 기회에 제2의 창간의 뜻을 분명히 해야겠다.…근래 우리 지면에 특히 서평란(예:윤정모 책, 폴 바란 책), 난맥 매듭 풀자(안병욱), 자전수필 필자(빈민운동가)의 선택이나 그들 말의 인용 등은 동아를 아끼는 독자의 빈축을 사고 있을 뿐 아니라 동아의 노선을 의심할 정도의 비판이 있음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체제부정이나 국민의 위화감 조성에 지면을 할애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보도지침'이라 부른 이 문건은 편집권에 대한 사주의 자의적 판단과 전횡 의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91년 동아사태는 그동안 독재권력 뒤에 숨어서 사실상 신문제작을 좌지우지해온 사주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실체임을 드러냈다는 의미가 있다. 동아일보 쪽의 의미축소와 다른 언론사들의 침묵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드러난 신문사주의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대부분의 족벌신문들 내부에서 진행형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623160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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