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5공정권 미화·찬양

[언론권력] 조.중.동,전두환 용비어천가

“광주난동 극복 새시대 기수”
“의리.정직의 지도자 ‥군 개입은 당연” 
각신문 너도나도 신군부 나팔수 노릇 
“12.12는 대승적 윤리 ““전씨집권 새시대” 
핏빛행보 쓸고닦고‥모든 움직임 대서특필 

1980년 민주화의 봄을 피로 물들이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까지 일등공신은 단연 언론이었다. 언론은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 가리기, 군의 정치개입 지지, 전두환 개인미화와 `영웅담' 유포로 대권가도를 닦아주어 한국 언론사상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런 보도태도는 광주항쟁에 대한 왜곡보도가 극에 달했던 80년 5월부터 전두환씨의 전역과 대통령 당선이 함께 이루어지는 그해 8월까지 절정을 이룬다.



[사진설명]“무정부 상태의 광주 …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탈취한 군트럭으로 과격파들이 거리를 무질서하게 누비고 있다.”(위) 1980년 5월25일치 사회면 머릿기사로 실린 현 <조선일보> 주필인 김대중씨의 광주 르포 기사에는 이런 내용과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인간 전두환” 등 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뒤부터 언론은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씨를 `민족의 새 지도자'로 찬양하기 시작했다(아래)


광주항쟁에 대한 첫 보도는 5월22일, 그것도 계엄사의 발표(21일)가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주필 이진희)은 이 날치에 이미 이를 `안보적 중대사태이다'라는 제목의 사설로 다루고 있다. 이 신문은 사건자체는 일체 보도하지 않은 채 23일치 1면에 `북괴방송 광주사태만 집중적 선동' 기사를 실었다.


<중앙일보>는 5월19일치 `자제와 화합으로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는 사설을 통해 “…이런 시점에서 보면 계엄령의 확대 시행은 그 목적이 사회질서, 사회 활동의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일 수 밖에 없다”고 5·17조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조선일보>도 나섰다. 25일치 사회면 `무정부상태 광주 1주…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 제목의 머릿기사는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트가 처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보도했다. 민주시민을 `난동자'로 몬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당시 사회부장으로 현재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다.


특히 조선일보는 같은날 사설 `도덕성을 회복하자'에선 “…비극의 나라를 우방으로 둔 그 나라(미국)에 대해서 목하 거추장스런 짐이 돼있는 우리로선 당혹스런 착잡한 심정마저 누를 길 없다”며 학살당하는 광주시민보다 미국에 누를 끼친 데에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언론의 이런 일방적 보도는 87년 6월 항쟁때까지 광주를 금단의 영역으로 남게 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8월4일 전국 불량배 일제 소탕 방침을 발표하면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실권자로 신문의 1면 머릿기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8월5일자 사설 `사회악 수술에 대한 기대'에서 “국보위의 이번 조치에 대한 기대는 바로 심층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에 대한 기대”라고 적고 있다.


석간이었던 중앙일보는 8월4일 사회면 머릿기사로 `주먹서 풀려난 유흥가 뒷골목'을 올려놓는 신속성을 보인다. 중앙일보는 또 문인 조연현씨를 등장시켜 `깡패소탕은 지속적으로'를 강조하고 `폭력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어 7일 조선·동아·중앙은 물론 모든 신문들이 전두환씨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인사말을 1면 머릿기사로 일제히 보도했다.
특파원과 외신보도도 전씨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켜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개인에 대한 미화작업의 물꼬는 <경향신문>이 터뜨렸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김길홍 기자)이란 제목으로 이 신문이 8월19일부터 3회에 걸쳐 연속기획을 내보낸뒤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인간 전두환' 찬양시리즈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기사에서 전씨를 “서릿발같은 결단력 뒤에 훈훈한 인정”이 있으며 “사생관이 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을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어 나온 조선일보의 기사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8월23일자 김명규 기자)'는 가히 압권이다. 이 기사는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으며,“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스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12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쪽에 서면 개인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이미 고인이 된 대통령의 억울함을 규명한다고하여 누가 알아줄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익혀온 양식으로선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접·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철저히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길이었다.…그의 판단은 육사 선후배라는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대승적 윤리관에서 내려진 결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0·26사태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고 미화했다.


같은 날자의 조선일보 사설은 더욱 노골적이다. `전두환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한 전군지휘관회의'에 대해 “국민 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 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불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 다음날인 8월24일치 조선일보의 통단사설 `길-새로운 길잡이가 나타나는데 붙여'에서는 궤변으로 군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하고 신군부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사설은 “어떠한 국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군인만은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오로지 군사적인 임무에만 전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데에는 분명히 사고와 인식의 맹점이 있다.…군이 안보의 견지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며…군이 진일보하여 나라의 강력한 구심체를 형성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있어서 현실을 사는 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새 시대 개막과 새정치'라는 정치부 기자 좌담기사에선 전 장군의 전역을 `파워 엘리트 교체'로 규정하고 `가장 잘 훈련·조직된 군부엘리트, 도덕성·성실성 높고 추진력 강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국일보>가 8월23일부터 상·중·하로 연재한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전역까지'(한국일보 하장춘 김훈 이연웅 장명수 기자), 중앙일보가 8월27일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 이후 8월28일부터 4차례에 걸쳐 실은 `솔직하고 사심없는 성격 전두환 대통령 어제와 오늘- 합천에서 청와대까지'(전육 이석구 김재봉 성병욱 기자), 동아일보가 8월29일 실은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우국충정 30년-군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관 '(동아일보 최규철 기자) 등은 제목만으로도 기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찬양시리즈가 조금 늦었던 중앙일보는 서종철 전국방장관을 등장시켜 `내가 아는 전두환 장군'(기록 권순용 기자)을 실었다. `혈연·지연 거부는 천성적'이란 제목을 단 이 글에서는 “솔직 담백하고 청렴결백했던 전 장군은 공사가 분명했다.…군에서 전 장군은 자리를 옮겨도 흔히 말하는 자기사람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전두환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사에 앞서 공을 그리고 나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인물로서 전 장군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방법을 3분의1만 흉내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의 통설”(조선일보), “전두환에게서 높이 사야할 점은 아무래도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의 자세로 사람치고 대개가 물욕에 물들었지만 그는 항상 예외”(동아일보), “ 견인분발의 인내심, 물욕에 대한 초탈, 체질화된 서민의식, 도덕적 겸허주의,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의 덕성…`양담배 한갑'정도의 부조리도 참아넘기지 못하고 바로 잡았던 `원칙장교'”(한국일보)로 포장됐다. 과연 신문에 실린 글인지 위인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 한국일보(9월2일자)는 `긍지와 정성의 군인가정-이순자 여사를 통해 본 사생활의 면모'(장명수 기자)에서 “청와대의 새 가족은 그 어느때보다 `젊고 화목한 청와대'를 꾸며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이씨의 `가계의 지혜'까지 소개하고 있다.


전두환씨와 5공정권에 대한 찬양은 물론 80년 5월과 8월에 그친 것은 아니다. 5공 내내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서특필되었고 미화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구 찬양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정권교체와 함께 사납고 날쌔게 돌변한다. 특히 조선일보의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전두환은 `민족사의 부정적 인물' 3위로 꼽혔다. `정의사회 구현'과 `민주주의 완성자'로 칭송되던 그가 졸지에 민주주의 파괴자로 낙인찍혔건만, 5공 나팔수였던 언론 대다수가 지금까지 과거에 대해 반성과 참회없이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51845021.html


[언론권력] 언론계 짙은 전두환그림자

영달출세냐,해직옥고냐 

언론계 짙은 전씨그림자 
찍힌 635명 거리로 ‥아부자들은 권부에, 금배지에 



전두환씨의 등장은 언론계를 양극으로 갈라놓았다.
철저히 전씨에게 아부하고 부화뇌동하는 도구로 언론을 타락시킨 기회주의자들은 출세를 보장받았다. 줄줄이 정계로 화려하게 진출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검열철폐를 부르짖던 언론인들에게 전씨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고 5공은 기나긴 암흑기였다. 


[사진설명]“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조선 80년 5월25일치), “북한은 오판 말라”(동아 〃 5월26일치), “곁에 수상한 자 없는가, 서로 펼쳐야 할 방첩사상과 대공활동”(한국 〃 5월29일치) 등 언론에게 광주민주항쟁은 간첩 등 불순한 배후세력이 짙게 드리운 학생·시민의 소요, 폭동, 난동이었다



1980년 5·17조치는 이런 편가르기의 분기점이었다.


5·17조치 이후 구속된 언론인은 모두 24명이다. 이중 실형선고를 받은 언론인은 19명. 5월17일 자정을 기해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들과 함께 언론자유투쟁의 주도자로 지목된 기자협회의 임직원은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정교용(중앙일보)·이홍기(한국방송공사)·이수언(부산일보)부회장과 감사 박정삼(서울경제), 편집실장 김동선씨와 편집실 기자 안양로씨 등이다. 노향기 부회장(한국일보)은 피신했다가 뒤에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김태홍(기자협회장), 노향기, 박정삼, 김동선, 안양로씨 등은 실형선고를 받고 1년여씩 복역했다.


한편 광주항쟁 취재기자들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체포된 사건도 있었다. 심송무(동아일보), 박종렬(동아방송), 오효진(문화방송), 노성대(문화방송)씨 등이다. 이 가운데 노성대씨를 뺀 세 명은 광주항쟁 당시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로 서울로 돌아와 취재내용을 발설했기 때문에 구속됐으며, 노씨는 간부회의에서 “광주사람들이 왜 폭도냐”고 발언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밖에도 5월17일 밤에는 송건호씨, 천승준(동아방송 방송위원)씨가 체포됐다. 옥고를 치룬 언론인들만 아니라 80년 강제 해직된 언론인 933명에게 80년은 악몽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불행과 비극은 보안사와 문화공보부가 애초에 언론사에 통보한 해직자수 298명에 비해 무려 635명이나 차이가 난 사실에서 드러나듯 군사정권뿐 아니라 언론사 사주나 고위 인사들의 부도덕성을 빼놓을 수 없다.


88년 5공비리 언론청문회에서 당시 특위의 조세형 위원은 허문도씨가 광주항쟁을 무력진압한 뒤 한달도 채 안된 80년 6월 중순 한국방송공사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언론의 역할'을 규정했다고 밝혔다. “통일때까지 또는 안보가 100% 이상이 없을 때까지 군이 집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방송기관을 비롯한 보도매체는 독일 `괴벨스'역할을 해야한다.” 한국언론이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허씨는 당시 실력자였던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비서실장을 맡으며 등장했다. 7명중 4명이 언론인이었던 국보위 문공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5공 청문회 당시 “언론 통폐합의 발상과 입안에 관한 한 나의 책임이다”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다.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허씨는 청와대 정무비서관, 문공부 차관, 정무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을 거치며 고속출세한다.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이원경 합동통신 회장, 이진희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손세일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은 국보위 입법회의에 입법의원으로 참여했으며, 방씨는 88년 5공 청문회에서 “대표적 악법인 언론기본법이 제정될 때 한번 항의라도 했어야하는 것이 언론인으로서 떳떳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질책을 받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두환 찬양시리즈를 `특종'해 다른 신문의 경쟁적 베끼기를 유도한 경향신문 정치부장대우 김길홍 기자는 82년 언론담당 2급서기관, 84년 1급 비서관을 거쳐 6공때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거듭 변신했다.


80년 4월21일자 서울신문에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는 시론을 쓴 것을 계기로 전씨와 독대한 이진희씨는 그 뒤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이 됐으며 82년 5월21일 문공부장관으로 취임한뒤 86년 다시 서울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하는 등 정관계와 언론계를 넘나들었다.


81년 3월25일 치러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정당 후보로 입후보해 금배지를 단 언론인은 모두 28명. 이 가운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곽정출씨를 비롯해 모두 21명이다. 80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최병렬씨 등 8명도 12대 국회에서 민정당에 합류했다. 분명 두 길 중 어디를 택할 지 선택의 자유는 있었던 셈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40519020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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