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조선·동아 사주 친일행적

[언론권력] 일장기 '조선일보' 신문제호위 올려

일제 침략전쟁 동참 독려…군수물자 헌납…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쓴 친일 논설·기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두 신문의 사주인 계초 방응모와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적은 신문지상의 친일 행위 못지않게 뚜렷하고 확고했다.

지난 1985년 조선·동아의 `민족지―친일지' 논쟁에서 일부 밝혀졌듯이 두 신문은 일제의 `문화통치' 일환으로 창간됐다. 1920년 3월 5일 먼저 창간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친일 상공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진태·예종석·민영기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 한달 늦은 4월1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편집국장 출신 이상협을 발행인으로, 이른바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박영효를 사장으로, 그리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20대의 지식인 김성수(1891~1955)를 주주대표로 하여 창간됐다.

이와 관련해, 1919년 민간지 창간 허가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의 회고는 음미할 만하다.

“조선어 신문을 허용함으로써 조선 총독부의 젊은 관리와 젊은 조선인들이 흉금을 터놓고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이는 분명 조선인의 사상을 완화하는 데 유효했다고 확신한다.”

총독부의 민간지 허가가 언론자유 창달이라든지 조선인들의 언로개방 등과는 거리가 먼, 조선인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이들의 의식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유연한 통치 도구 차원이었음을 드러내주는 증언이다.

조선일보는 창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영난을 겪으며 몇차례 경영권이 옮겨간 뒤 1933년 신흥 금광 부호였던 방응모(1883~1950)에게 넘어갔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까지 조선일보는 친일파와 반일파가 경영권을 주고받는 과정을 겪었다. 친일파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조진태를 사장으로 한 초대 경영진은 5개월 뒤 `반일파'인 권병하-윤문하 체제로 잠시 바뀌었으나 총독부의 잇단 정간조처 끝에 1921년 매국노 송병준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송병준은 이후 3년 동안 조선일보를 이끌었다.

조선일보는 1924년 다시 신석우에게 인수되는데, 이때부터 이상재―신석우―안재홍-조만식으로 이어지는 민족진영 계보가 사장을 다시 역임한다. 조선일보가 내세우는 반일 논조의 기사와 사설은 대부분 이때와 권-윤 체제기에 쓰여진 것들이다. 또 당시 반일 기사를 쓴 기자의 상당수는 박헌영 등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반일 계보는 1933년 방응모가 신문사를 인수한 뒤 맥이 끊긴다. 그것은 창간 이후 4차례 당했던 정간 조처가 방응모 인수 후 폐간될 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데서 우선 확인된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 민족지로서 면모를 어느 정도 드러냈지만, 몇 차례 정간조처를 받으며 서서히 기개가 꺾인다. 창간 초기에 주식공모에 적극적 역할을 했던 김성수는 1924년 동아일보의 실질적 소유자가 된다. 총독부는 이 무렵 김성수의 친동생 김연수가 경영하던 경성방직에 `사업보조비'란 명목으로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 결과, 경성방직은 기업으로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공격적 경영전략으로 동아일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먼저 33년 4월 26일 방응모는 당시 5만부 남짓한 평균발행부수의 20배에 이르는 조선일보 혁신기념호 100만부를 찍어 전국에 무료로 뿌리고, 당시 동아일보 편집진 이광수와 서춘을 편집국장과 주필로 스카웃했다.

두 신문의 경쟁은 `일본인 광고주 기생관광'으로까지 이어졌다. 1934년 동아일보가 일본의 제약·제과·화장품 회사 간부 20여명을 초청해 기생관광을 시켜주자 조선일보도 이 수법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광고주 쟁탈전이 이처럼 이전투구 양상으로 번지자 문인 김동인은 “민간지들이 이윤추구를 위해 `매족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두 신문과 사주의 경쟁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친일행위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방응모는 1934년 <삼천리> 4월호와 한 인터뷰(`신문사 사장의 하루―방응모씨')에서 “천도군 사랑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고 밝혀, 일제에 군수물자를 헌납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경쟁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하면서 농도를 더한다.

1938년 6월 22일 김성수와 방응모는 총독부가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김활란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국정신의 현양 △징병·학병 독려 △전시 경제 정책에 대한 협력 등 실천 요강을 적극 홍보했다. 그해 9월 방응모는 총독부가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 백관수와 함께 참가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 조선인의 동참을 호소했다.

또 39년 5월 친일언론인단체인 조선춘추회 주최로 열린 `배영(排英)국민대회'에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고, 방응모는 “황군 만세”를 선창했다. 40년 10월 17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해체되고 국민총력 조선연맹이라는 더 강력한 친일 대국민 선전기구가 결성되자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와 함께 이 단체의 참사 겸 이사로, 방응모도 참사로 참여해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내몰고, 후방의 조선인은 위문품을 모아 보내도록 하는 선전활동에 나선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침략행위가 광기로 바뀌는 1941년에는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됐다. 이때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으로 참여해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김동환·이광수·모윤숙·윤치호 등과 함께 `채권가두 유격대'의 일원으로 나서 조선백성에게 일제의 전쟁채권을 사도록 독려했다. 또 이 무렵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등이 1천만원을 들여 설립한, 전쟁조력회사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선출됐다. 41년 10월에 친일단체 총결집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김성수는 이 단체의 감사로, 방응모는 이사로 참여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전장으로 내모는 데 첨병노릇을 한 단체다.

1940년 일제가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자 방응모는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을 본격적인 친일잡지로 개편했다. 나아가 스스로 친일논설을 쓰기도 했다. 1940년 조광 3월호 권두언에서 그는 “안으로는 신체제 확립과 밖으로는 혁신외교정책을 강행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일단의 노력을 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조광을 일제의 `대동아 정책'을 널리 알리는 도구로 쓸 것임을 분명히한 것이다. 이어 그가 조광 1942년 2월호에 쓴 논설 `타도 동양의 원구자(원수)'의 내용은 이렇다.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미국)에게서 동아(東亞)를 이탈시켜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
미국을 원수로, 일본은 평화의 사도로,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논설에서 그는 전쟁 승리를 위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국민 개로(皆勞)운동, 물자절약,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글에서 내린 결론은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때에 물력과 심혈을 총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조광은 조선어 잡지였는데도 42년에 이르면 아예 일어로 쓴 기사를 싣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창간기념 특집으로 `조선일보 사장열전'을 연재하면서 `계초 방응모'편에서 “폐간 후 계초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가 친일잡지를 발행하고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성전문학교 설립자로서 지식인이었던 김성수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매일신보의 연속물(`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 `대의에 죽을 때―황민됨의 책무 크다'를 기고하는 등 여러 편의 극렬한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다음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편에 쓴 글의 일부다.

“평소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전을 앞둔 오늘날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의무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늘 말하여 왔거니와 지금이야말로 제군은 이 말을 현실에서 몸으로써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 성전에 치참치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써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앞서 43년 8월 5일치 매일신보에 쓴 `문약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라는 논설에서도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시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을 양(養)하여 황도를 선명(宣明)하자”고 선동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변방을 돌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이들은 말과 글을 동원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조선의 물자를 일제에 바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조선일보가 지난 85년 동아일보와 벌인 `친일 논쟁'에서 “두 신문의 친일시비로 얻어지는 것은 서로의 상처뿐이며, 잃는 것은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일 따름”이라고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인촌기념회가 발간한 <인촌 김성수>는 당시 인촌이 쓴 글들은 모두 <매일신보>가 조작해 썼다고 주장했다. 1991년 동아일보사가 펴낸 <평전 인촌 김성수>는 인촌을 “일제 강점의 암흑기에 수난극복의 횃불을 밝혀 근대화의 민족적 과제를 착실히 이룩하는 데 거인의 발자취를 남겼고, 특히 민족교육·민족언론·민족산업의 3대과제의 발전에 힘씀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건설의 기틀을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또 1980년 간행된 방응모의 전기 <계초 방응모>의 서문 첫 줄은 “암흑기의 민족에게 언론의 횃불을 밝혀 민족의 길을 비추었던 선구자”로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과 이들의 주장 사이의 괴리는 이렇게 크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91900198.html


[언론권력] 나치부역 언론인엔 '관용'이 없었다

프랑스는 관용(톨레랑스)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군대에 체포된 나치 부역자들(콜라보). 주간 <파리마치>는 이들이 모두 처형됐다고 전했다.

그 관용의 역사는 유서가 깊은 것이어서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말할 자유를 탄압한다면 당신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라는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선언에서 벌써 투철한 정치적·이념적 관용 정신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도 2차대전 때의 나치부역자에게만은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나치 점령기 동안 독일에 협력한 사람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이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혹독하게 죄를 물었다. 그런 점에서 해방 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들의 공격을 받아 해산되고 응징의 기회를 상실한 우리의 사정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1940년 히틀러 군대에 점령당한 지 4년 만인 44년 8월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즉각 `정의의 법정'을 세우고 나치 부역자 단죄에 나섰다. “나라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반역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 장군의 신념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부역자 색출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99만여명의 나치협력자가 투옥되고 이 중 6700여명에게 사형, 2700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 1만여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만2800여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또 9만5천여명에게는 부영죄형을 선고하고 7만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렇게 단죄받은 나치부역자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엄중하게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지식인, 특히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법정은 언론인 중에서도 애초부터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파시스트보다 독일의 지배가 확립되자 뒤늦게 나치 선전원으로 돌아선 `매춘 언론인'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드골이 밝힌 `최우선 가중처벌'의 이유였다.

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는 “프랑스를 지켜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한 기사와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기사를 쓴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세르는 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반민족 언론인들의 사상적 지도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다. 독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르 마탱>의 편집국장 스테판 로잔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 밖에 독일방송의 선전문을 작성했던 폴 페드로네, 독일 점령 기간중 <라디오 파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장 헤롤드-파퀴, 36살의 작가 겸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 등이 민족반역자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와 함께 나치 찬양에 적극적·소극적으로 나섰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독일 점령 기간중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해 폐간시키고 언론사 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900여개의 신문·잡지 가운데 649곳이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나라에 빼앗겼다. 일간지 가운데 처벌을 면한 것은 <르 피가로> 등 3곳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치점령기 동안 자진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었다.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단죄와 관련해 <프랑스의 대숙청>을 쓴 언론인 주섭일씨는 “드골의 언론계 대숙청으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언론은 각계 각층 국민의 의사를 공정하게 대변하는 공공성을 확보하게 됐고, <르 몽드> 같은 세계가 존경하는 신문도 언론개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프랑스의 언론인 숙청은 단순히 반민족세력의 처단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부도덕한 인간들이 언론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와는 반대로,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이니 “일본군 입대는 조선인의 의무”니 거리낌없이 떠들었던 우리의 친일신문들은 아무런 처벌도 응징도 받지 않고, `민족지'로 둔갑해 수십년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921262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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