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김일성 잘한 일도 그대로 썼어요”

‘인물로 읽는 한국사’ 완간한 이이화씨





왕인에서 함석헌까지 260명 다뤄
“조봉암·허헌 같은 중도파에 연민
이승만, 긍정적인 면모 전혀 없어”

이이화(7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 쓴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김영사·각 권 1만3000원)가 완간됐다. 10권으로 마무리된 이 시리즈에는 고대의 왕인에서 현대의 함석헌에 이르는 역사 인물 260여명이 등장한다. 몰입도 높은 이야기체 문장으로 인물의 공과를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평가받는 이 책들은, 시절의 참담함에 좌절한 40대 역사학자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겠다’는 심정으로 감행한 자기 유폐의 산물이다.

“1981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백과사전 편찬하는 전문위원 자릴 얻었는데, 국회의원들 상대로 민족의식 연수를 한다 뭐다 자꾸 못살게 해요.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구리 용마산 자락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 잡는 나라의 녹은 절대 받아먹지 않을 작정이었죠. 그때부터 원고료만으로 살았어요. 잡지와 사보에 주로 글을 썼는데, 편집자들이 대체로 원하는 게 인물 이야기였습니다.”

» 이이화(7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사진 김경호 기자

12일 파주 헤이리의 자택에서 만난 이 이사장은 호구지책으로 쓰기 시작한 인물 이야기가 자신의 ‘대표 종목’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영웅사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역사의 생생한 결을 느끼는 데는 인물을 통해 접근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드물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물사를 쓰는 데도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부모가 비범한 태몽을 꿨다거나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릴 들었다, 집안이 훌륭하다 따위의 얘기는 쓰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태생부터 남달라야 한다는 편견을 심어주기 때문이죠. 또 한 사람이 지닌 다양한 면모를 함께 보여줘야 합니다. 세상엔 절대적인 악인도 선인도 없으니까요.”
이런 원칙들은 박정희·김일성 등 현대 정치인을 다룬 마지막 권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를 쓰면서도 지켜졌다.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일방적 비판만 받아온 두 사람에 대해 긍정적 면모를 함께 기술한 것이다.

“근대화를 향한 박정희의 열정과 추진력이나 김일성의 고난에 찬 항일투쟁은 인정해야지요. 박정희의 강직함이나 김일성의 흡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지 않았고, 김일성이 우상화와 권력세습에 나서지 않았다면 역사의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역사학계로부터 인색한 평가를 받아온 조병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이사장은 그를 두고 “말썽 많은 극우주의자였지만, 대담하고 과단성 있는 야당 지도자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냉정했다.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보려고 무던히 애 썼습니다. 그런데 없어요. 평생이 속임수로 점철된 사람입니다. 왕손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독립외교 한다는 미명 아래 호텔에서 자고 고급 음식만 먹고 다녔어요. 심지어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결혼했던 여자가 대통령 되기 직전까지 남대문 밖에 친딸과 함께 살았는데도 한번도 안 찾았어요.”

반면 조봉암·허헌 같은 남과 북의 중도주의자들에 대한 기술에선 강한 연민과 애정이 묻어났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강요하는 시대의 암흑기에 그들이 겪었을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념보다 민족의 가치를 높이 두었던 중도 민족주의자였다는 거예요. 홍범도나 이동휘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계열에 몸 담았지만 그 사람들, 마르크스가 누군지 볼셰비키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오로지 독립투쟁 하겠다는 일념으로 소련 무기 받아 싸우려고 그쪽으로 간 겁니다.”

이 이사장은 현대의 인물일수록, 또 직접 경험한 사람일수록 글을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주변의 권유에도 장준하 전 <사상계> 주간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약전을 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사자나 가족,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부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정성을 지키기가 어려워서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원래 당대의 인물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 쉬워요. 사람이란 게 술 마시면 헤롱거리고 실수도 하고, 다 거기서 거기거든요. 문제는 일정한 신비감이 없으면 더 큰 편견이 작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가능해지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지요.”

그는 요즘 27년 전 용마산 칩거를 결행하던 당시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서울 나들이를 삼간 채 외국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소개하는 통사를 집필중이다. 이를 두고 그는 ‘수양’이라고 했다.
“서울 자주 가면 뭐합니까? 공연히 화나 치밀지요. 역사를 보면 이런 시절 자주 있었어요. 이럴 땐 집에서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상책입니다.”


<한겨레/ 글 이세영 기자, 사진 김경호 기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